판사가 되기 전에는 판사가 되었을 때 증인들의 말과 증거를 살펴보면 소설 셜록 홈즈나 드라마 속 CSI처럼 손쉽게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 소설이나 드라마가 감추어 둔 사실관계는 두세 가지 증거만 나와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러나 현실 재판에서는 과거 진실을 온전하게 복구하는 데 필요한 증거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증거가 충분히 많다면 피고인이 부인하지도 않을 것이고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인 간에 이견이 생기지도 않을 것이다.
현실의 법정에서 증거 몇 조각을 가지고 과거의 사실관계를 온전하게 복구한다는 것은 이미 와장창 깨어져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들고 유리창을 복구하는 작업과 같다.
유리 조각의 절반은 이미 온데간데없고, 몇 조각을 집어 들어봤자 그것이 있던 자리가 어딘지 알기 어렵고,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누군가가 유리 조각에 손을 벤다. 한 마디로 그것이 확실한 진실이라고 신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이다.
가해자는 가해자라서, 피해자는 피해자라서 각자의 이해관계가 있어 온전히 믿기 어렵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제외한 사람들, 그러니까 증인의 말도 법정에서는 기본적으로 불신의 대상이다.
제삼자들도 나름의 이해관계가 있다. 가해자나 피해자 어느 쪽과도 척지고 싶지 않거나 사건에 개입되어 피곤해지기 싫어서, 또는 둘 중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주기 위해서 위증을 할 수 있다.
증언의 진실성을 보장해 주는 장치는 위증죄가 거의 유일하다. 그러나 위증죄로 처벌하는 것은 그리 쉽지가 않다.
재판이 다 끝나고 난 뒤에 누군가가 별도로 위증죄로 고발을 해야 하고, 그 경우에도 어떤 말이 위증인지를 입증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수사가 쉽지도 않다. 또 증인이 의도적으로 진술을 조금 얼버무려 버리거나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같은 단서를 붙이면 위증죄 책임을 묻기가 어려워진다.
이론적으로는 판사가 증인의 표정, 몸짓, 목소리의 떨림 등 태도를 종합적으로 보고 그 신빙성을 판단한다고는 하지만 현실의 판사는 대부분 그렇게 판단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보는 사람의 경우에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 낌새를 알아챌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평소에 (진실을 말할 때의) 말투와 표정과 몸짓을 알고 있어 거짓말을 하는 순간 달라지는 변화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판사일 때를 생각해 보면, 증인의 평소 말투나 표정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장을 입고 경직된 자세로 앉아 있는 증인의 상체만 30분 내지 1시간을 바라본다고 저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게다가 판사는 하루에도 여러 건의 재판을 동시에 진행하기에 그 느낌에 대한 기억을 계속 유지할 수가 없다. 느낌이라는 것도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서 판결문에 논리적인 글로 반영하기 어렵다. 그래서 증인의 증언 태도를 근거로 증언의 신빙성을 배척하는 판결은 현실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는 서면 중심의 재판을 한다. 즉, 모든 재판 내용을 텍스트로 적은 기록을 만들고 그것을 읽으면서 판결문을 작성하는 방식으로 판결한다. 증인의 증언도 텍스트화된다. 그러면 현실의 실제보다 텍스트가 훨씬 중요하게 부각되고 시각적, 후각적, 상황적 맥락은 소실된다.
법원이 증언의 텍스트만을 중시하기 때문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할 때도 ‘구체성’과 ‘일관성’만을 따지는 것이다. 구체성이라는 것도 텍스트의 구체성이고 일관성도 동일한 텍스트가 반복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진술자가 울면서 했던 진술과 웃으면서 했던 진술이 ‘텍스트’만 같으면 일관성이 인정된다.
일단 그렇게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해 버리고 나면 그에 반하는 주변의 다른 상황은 비상식적 논리를 동원해서라도 배척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재판하는 현실에서는 피해자가 작정하고 피해 사실을 지어내서 앵무새처럼 단 두 번만 반복하면 꼼짝없이 범죄자가 되고 만다. 특히 성격상 다른 증인이 있기 어려운 성범죄의 경우가 더욱 그렇다. 성범죄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찾아보기가 유독 희박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