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출 모집인이 고객의 명의를 도용해 이중 대출을 받은 경우, 해당 고객은 대출금을 갚을 책임이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금융사 오릭스캐피탈이 전세대출 사기 피해자 A씨를 상대로 제기한 대여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6일 밝혔다.
A씨는 2019년 경기 남양주시의 한 아파트 전세계약을 맺고, 보험사를 통해 2억2000만원의 전세자금 대출을 받았다. 당시 대출모집법인 B사에 서류 작성과 절차를 위임하면서 인감증명서, 주민등록초본, 예금통장 사본 등을 제출했다.
문제는 대출 실행 일주일 뒤 발생했다. B사는 같은 서류를 이용해 오릭스캐피탈에서도 A씨 명의로 2억800만원을 추가로 대출받았다.
앞선 대출 내역이 신용정보시스템에 반영되기 전의 시간차를 이용한 이중 대출이었다. 이후 B사 관계자들은 사기죄 등으로 기소돼 2021~2022년 사이 모두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오릭스는 모집인에게서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하자 A씨를 상대로 대출금 상환을 요구하며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B사가 A씨의 인감증명서와 예금통장 사본 등을 제출했고, 오릭스로서는 A씨에게 대리권이 있다고 믿을 만한 정당한 사유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민법 제126조 ‘표현대리’ 조항에 따라, A씨가 대리인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A씨는 오릭스 대출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계약은 명의 도용을 통한 것으로 대리행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1심을 뒤집고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특히 오릭스가 본인 확인 및 모집법인 관리 의무를 소홀히 했다고 지적했다.
대법원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재판부는 “금융회사는 고객의 신원과 대리권 여부를 확인함에 있어 일반인보다 더 높은 수준의 주의 의무를 부담한다”며 “오릭스가 대출 실행 이후에도 이중 대출 여부를 점검하지 않아 피해가 반복된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이어 “설령 모집인이 위탁관계를 악용해 명의를 도용했고, 금융사가 이를 알지 못했더라도, 그 사실을 몰랐다는 이유만으로 명의자에게 변제를 요구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