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에 가담되어 억울함을 호소하는 의뢰인들이 많다. 문제는 그 억울함을 말로는 입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박의 여지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면 그 정황을 남겨두어야 한다.
“그냥 취직 좀 해보려고 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필자를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한 의뢰인은 30년 넘게 경찰로 근무하다 퇴직한 전직 경찰관이었다. 평생을 법과 원칙을 지키며 살아온 그에게 은퇴 후의 삶은 낯설고 막막했다.
퇴직 후 찾아온 공허함과 무력감 속에서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지내던 의뢰인은 결혼을 앞둔 외동딸에게 한 푼이라도 보태주고 싶다는 마음에 아르바이트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눈에 띈 아르바이트 공고는 ‘고수익 단기 일자리’를 제안하는 곳이었다. 시급도 좋았고, 복잡한 조건을 요구하지 않아 의심 없이 수락했다. 그렇게 그가 맡게 된 일은 다름 아닌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의 ‘현금 수거책’이었다.
보이스피싱은 점점 더 정교하고 조직적으로 진화하고 있고, 지시도 매우 체계적이다. ‘고수익 알바’나 ‘간단한 심부름’처럼 위장한 모집 공고를 통해 범죄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을 끌어 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단순한 아르바이트인 줄 알고 시작했다가 범죄에 가담하게 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수사기관의 시선은 이와 다르다. 단지 ‘몰랐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책임을 면하기 힘들다. 특히 대법원은 범행 방식이나 전반적인 구조를 자세히 몰랐더라도, 피해자의 현금을 직접 수거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미필적 고의로 보고 있다. 이런 경우, 방조범을 넘어 ‘공동정범’으로 보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하는 추세다.
수거책은 말단일 뿐이라는 항변은 현실에서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다. 실제 보이스피싱 조직의 핵심 인물들은 대부분 해외에 숨어 있고, 이들은 대포폰과 대포계좌를 이용해 치밀하게 흔적을 감추기 때문에 검거가 쉽지 않다. 결과적으로 실제로 검거되는 사람은 대부분 현장에 직접 나가 피해자의 돈을 수거하거나 전달하는 수거책이다.
이들이 범죄를 현실화하는 손이기 때문에 법원과 수사기관은 그들을 엄중하게 처벌함으로써 사회에 경각심을 주려는 것이 사실이다.
변호사로서 수사기관과 법원의 이러한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 죄를 지었다면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는 것이 맞고, 사회적 피해를 고려하면 단호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점도 공감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범죄의 구조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가담하게 된 이들, 실질적인 지배력이나 통제권 없이 단순히 지시에 따라 움직였을 뿐인 사람들이 제대로 항변하지 못한 채 억울한 처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도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이런 사건에도 반박의 여지는 있다. 그 핵심에는 ‘처음부터 이 일이 범죄인지 몰랐고, 나 역시 속아서 가담한 피해자 중 한 명이다’라는 점을 입증할 자료들이 있다.
예를 들어, 메신저 대화 내역 중 관리책이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렸던 최초의 내역이나, 자신의 실명과 실제 전화번호를 사용하고 범행 장소마다 CCTV에 얼굴이 노출되는 것을 개의치 않고 활동했던 흔적 등은 모두 유리한 정황 증거가 될 수 있다.
피고인이 실제로 해당 업무가 범죄와 관련된 것임을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건, 많은 이들이 수사 초기 단계에서 겁에 질린 나머지 본인에게 유리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들을 스스로 없애버린다는 점이다. 휴대폰을 초기화하고, 메시지를 삭제하고, 심지어 그때 입었던 옷까지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증거가 사라지면, 설령 억울한 상황에 처했다 하더라도 법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길은 점점 좁아진다. 그래서 꼭 강조하고 싶은 건, 어떤 상황이든 성급하게 움직이기 전에 먼저 조언을 구해보라는 것이다. 변호사에게 솔직하게 사실 관계를 말하고 본인의 입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하는 게 우선이다.
누군가를 변호한다는 건, 단순히 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처한 사정과 억울함을 법적으로 설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번 사건도 그랬다. ‘그저 시키는 대로 일을 했을 뿐’이라는 말이 모든 책임을 덮어주지는 못하겠지만, 그 말에 담긴 정황과 맥락을 증거로 남겨둘 수 있다면, 억울한 처벌을 피할 여지는 분명히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