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0년 넘는 세월을 형사법정에서 살아왔다. 매년 수천 건의 사건이 오가는 재판정에서 피고인의 말 한마디, 판사의 판결문 한 줄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송두리째 바꿔놓는지를 숱하게 지켜보았다.
또 정의란 무엇인지 고민했고, 범행의 고의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 가운데, 최근 대법원에서 나온 한 판결을 통해 다시금 ‘정의’라는 단어의 무게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피고인은 일자리를 구하던 중 한 업체로부터 채권 회수 업무를 맡아보겠느냐는 연락을 받고, 일명 ‘보이스피싱 수거책’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는 조직원의 지시에 따라 피해자로부터 현금을 수거하고 이를 송금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이에 대해 1심은 유죄, 2심은 무죄,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법원은 다시 유죄를 선고하며 원심을 파기 환송하였다.
대법원은 “범죄에 공동 가공하려는 의사가 결합해 현금을 수거했다는 사실을 미필적으로 인식했으면 공범이 된다”고 판시했다.
범행 방식이나 전체 구조를 몰랐더라도, 자신이 범행에 가담했다는 인식을 조금이라도 했으면 공범이 된다는 뜻이다. 피고인이 고용업체의 정체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 높은 수당을 받았다는 점, 일부 금액을 경비로 사용한 점 등이 그러한 판단의 근거로 제시되었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과연 그것이 형사사법이 요구하는 ‘고의’에 대한 입증인가? 형벌권은 한 개인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는 국가의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그렇기에 형사재판에서의 유죄 판단은 단지 죄를 저질렀다는 의심이 있는지를 넘어, 피고인의 혐의에 대한 실질적인 확신에 기반해야 한다.
대법원이 언급한 ‘미필적 고의’는 결코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당사자가 “범죄일지도 모른다”는 인식을 실제로 갖고 있었는지를, 구체적인 정황을 바탕으로 엄밀히 검토한 끝에 신중하게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 피고인은 자신의 업무가 보이스피싱과 관련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고, 이를 단순한 채권추심 업무로 이해했다.
그는 실제로 가족에게 자신의 업무를 설명했으나 이상하다는 가족의 만류로 즉시 일을 그만두었다. 수사기관의 디지털 포렌식에도 자발적으로 휴대전화를 제출했다. 이처럼 자신의 행위가 범죄와 관련 있다는 자각이 있었다면 보통은 감추고 숨겼을 행동을, 그는 오히려 투명하게 드러냈다.
나는 지금의 대법원 판결이 형사사법의 가장 본질적인 원칙을 너무 쉽게 경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한다.
피고인의 진술에만 의존하지 않고 외부에 나타난 정황과 상황을 기준으로 심리상태를 추인한다는 대원칙 자체는 옳다. 그러나 그러한 추인이 ‘상식적으로 좀 이상하지 않았냐’는 식의 경험적 추정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
피고인이 처한 현실, 사회경험, 실제 인식의 가능성, 그리고 행위의 동기와 경과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만 형사책임이란 이름으로 한 사람을 단죄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보이스피싱 수거책은 대부분 공범’이라는 선입견이, 증명의 책임을 검사가 아닌 피고인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피고인이 사회초년생으로서 구직 중 범죄조직의 기망에 넘어갔다는 점, 보이스피싱 피해자들도 처음에는 합법적인 대출이나 채무 관계로 인식했다는 점 등을 비춰보면, 과연 그가 사기범죄의 전모를 인식하고 이를 용인한 것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보이스피싱 범죄 구조의 복잡성, 역할 분담의 다층성, 그리고 범행 초기에 제공된 정보의 한계까지 고려하면, 무조건적인 ‘공범’ 낙인은 위험하다.
보이스피싱은 분명 중대한 사회적 해악이다. 그러나 그 범죄의 무게가 클수록, 그 책임을 묻는 기준은 더욱 정밀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지금 우리가 요구해야 할 것은 ‘무차별적인 공범 지정’이 아니라, 보이스피싱이라는 복잡하고 교묘한 범죄구조 속에서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공범’인지에 대한 냉철하고 세밀한 구분이다.
형사재판은 빠른 결론이 아니라, 깊은 성찰을 추구해야 한다. 단순히 범죄 피해금액의 크기나 여론의 압박에 재판부가 휘둘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히려 지금 같은 때일수록, 피고인의 주관적 고의와 책임을 한 줄 한 줄 조심스럽게 따져가며, 형사법정이 ‘진정한 정의’의 최후 보루로 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되새겨야 한다.
정의는 속도보다 방향이다. 나는 오늘도 그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 방향을 법정 안에서 끝까지 지키기 위해 다시 재판정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