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1년 10월 19일, 토요일 오후의 여의도광장은 시민들로 가득했다. 지금은 숲이 우거진 여의도공원으로 바뀌었지만, 당시는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광활하게 펼쳐진 광장이었다. 여의도광장은 특히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사랑받았다.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기에 이만한 장소가 없었던 이유다.
그날도 여의도광장에는 아이들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들로 북적였다. 그러나 광장을 채우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난데없이 등장한 차 한 대 때문에 한순간 비명으로 바뀌었다. 광장의 남쪽 끝에서부터 돌진해 온 녹색 프라이드는 광장을 지그재그로 가로지르며 400m를 질주했다. 시속은 무려 100km에 달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차량에 치여 여기저기 쓰러졌다. 어린이 2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21명이 중경상을 입은 대형 사고였다. 차는 철제 자전거 공구함을 들이받은 뒤에야 멈췄다. 시민들은 차 주위로 달려가 유리를 깨고 운전자를 끌어냈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김용제였다. 김용제는 시민들을 뿌리치고 옆에 있던 여중생을 인질로 붙잡았지만 다수의 시민들에게 제압당하며 주말 공원을 덮친 광란의 질주도 막을 내린다.

김용제는 충북 옥천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각장애인이었고, 어머니는 시각장애가 있었다. 김용제도 선천적인 약시를 가지고 있었으나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치료받지 못했고, 돈이 없어 안경도 못 쓰고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성인이 된 김용제는 세차장, 중국집 배달원, 인형 공장 직공 등 닥치는 대로 일자리를 구했지만 나쁜 시력 때문에 실수가 잦았고 오래 못 가 번번이 해고되었다. 사회를 향한 김용제의 원망과 분노는 해고가 반복되면서 점점 커져갔다. 마지막으로 일했던 부산의 한 신발 공장에서도 해고되자 김용제는 마지막 결심을 한다. 그건 바로 사회를 향한 복수였다.
김용제는 남도 죽이고 본인도 죽겠다는 생각으로 평온했던 주말의 광장을 덮쳤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김용제는 무면허였고, 그가 몰고 온 녹색 프라이드는 다니던 공장 사장의 차량을 훔쳐 온 것이었다. 김용제는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범행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한마디로 그냥 다 죽여버리고 싶어서…”
그는 자신의 범행으로 어린이 2명이 사망했음에도 “피해자들에게 미안한 생각 없다”, “사람들이 재수 없어서 그런 거니까 할 수 없다”, “어차피 죽으려고 했으니까 무작정 달려 들어갔다”고 밝혀 사회에 더 큰 충격을 안겼다.
살인죄로 재판에 넘겨진 김용제는 1991년 11월 29일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불우한 가정환경과 시력장애를 스스로 극복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채 많은 사람을 죽음의 동반자로 삼기 위해 눈을 감고 차를 몰아 아무런 원한, 감정이 없는 어린이 2명을 치어 숨지게 하는 등 극도의 인명 경시 의식을 지녀 재범 우려가 있기 때문에 영원히 우리 사회에서 격리하고자 한다”며 선고 이유를 밝혔다.
김용제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와 상고를 제기했지만 모두 기각됐고 1992년 8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5년 6개월 뒤인 1997년 12월 30일 다른 사형수 22명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다. 이날 이후 우리나라에서 사형이 집행된 적이 없어 김용제는 사형이 집행된 마지막 사형수로 기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