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태하] 말 vs 말 – 성범죄 사건의 증거 판단 기준

피해자 진술만으로 유죄 될 수 있을까
객관적 증거 희박한 성범죄 사건 특징
‘말 대 말’ 싸움 속 재판부의 판단은
일관성·신빙성·합리성·맥락 부합 따져

 

성범죄 사건은 다른 범죄와 달리 ‘증거 판단’이 유난히 어렵다. 대부분 은밀한 공간에서 단둘이 있을 때 발생하기 때문에 CCTV나 녹취 같은 객관적 증거가 남지 않는 경우가 많다. 목격자도 없고, 외부에서 확인 가능한 정황이 희박하다 보니 결국 피해자와 피고인의 말이 정면으로 맞서는 상황이 반복된다. 그래서 실무에서는 이런 사건을 두고 흔히 ‘말 대 말 싸움’이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을 품는다. “그렇다면 피해자 진술만으로 유죄가 될 수 있는가?” 단순히 말 몇 마디로 한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가 하는 불안감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오랫동안 같은 입장을 유지해 왔다. 피해자의 진술이 사건의 핵심 부분에서 일관되고, 경험칙상 합리적이며, 다른 증거와 모순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성범죄의 특수성을 고려한 법리다. 즉, 꼭 물적 증거가 있어야만 범죄가 입증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법원은 어떤 기준으로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을 가늠할까. 우선 진술의 일관성이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진술이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유지되어야 하며, 시간이 지나 표현이 약간 달라지더라도 사건의 본질적 내용—행위, 장소, 시간, 상황—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 다음으로 진술의 구체성이 신빙성 판단의 또 다른 축이다. 막연한 설명이 아니라 장소의 구조, 당시 나눈 대화의 내용, 주변의 정황 등 세부 정황이 드러날수록 진술은 사실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여기에 합리성과 객관적 부합성도 필수적이다. 피해자의 진술이 상식과 경험칙에 비추어 보아 납득될 수 있어야 하며, 문자메시지·의료기록·CCTV 등 다른 정황 증거와 충돌하지 않아야 한다. 반대로 진술이 수사 과정에서 여러 차례 번복되거나, 객관적 사실과 명백히 어긋나거나, 피해자가 사건을 통해 금전적·사회적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가 뚜렷이 엿보인다면 법원은 신빙성이 낮다고 본다.

 

실제 판례에서도 이러한 기준이 일관되게 확인된다. 예를 들어, 대법원은 피해자의 진술이 다소 일관되지 않더라도 그 이유가 외부의 압박이나 심리적 혼란에서 비롯된 경우에는 전체 맥락상 신빙성을 부정할 수 없다고 본 바 있다. (반대로 피해자의 진술이 객관적 정황과 뚜렷이 배치되거나, 허위 신고의 동기가 명백할 경우에는 무죄가 선고되기도 한다.)

 

실무 현장에서도 피해자와 피고인의 문자메시지, SNS 대화, 이후의 관계 유지 여부가 판결을 뒤집는 결정적 요소가 된다. 필자가 맡았던 사건 중에도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었다. 당시 의뢰인은 본인에게 씌워진 성폭행 혐의를 벗기 위해 우리를 찾아왔다. 피해를 주장하던 상대는 “성폭행을 당했다”고 진술했으나, 직후에 피고인과 평소처럼 연락을 주고받으며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간 정황이 확인되었다. 해당 사건은 결국 불송치 처분이 내려졌다.

 

이처럼 성범죄 사건의 증거 판단은 단순히 “진술의 진위”를 따지는 수준을 넘어, 진술의 맥락과 심리적 배경까지 함께 분석해야 하는 복잡한 작업이다. 수사기관이나 법원은 피해자 보호와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이라는 두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물적 증거가 잘 드러나지 않는 성범죄 사건 특성상, 이 과정에서 양자 간의 미세한 진술의 변화조차 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진술의 신빙성’을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대응이다.

 

억울함을 주장하는 피고인이라면 단순히 “나는 무죄다”라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의 진술이 얼마나 일관되고 합리적인지, 그리고 그 주장이 실제 정황과 어떻게 부합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수사 초기부터 모든 대화, 문자, 만남 기록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모순될 여지를 사전에 차단하는 대응이 필요하다.

 

법은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진실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기 위해 법원과 변호사는 끊임없이 고민한다.  성범죄 재판에서 증거 판단이 유난히 ‘애매하고 느리다’고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그 신중함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문제인 만큼, 단 한 줄의 진술도 가볍게 다뤄질 수 없다. 피해자 보호와 피고인의 인권이 충돌하는 그 경계에서, 진실은 언제나 세밀한 증거 분석과 치열한 논증 위에서만 드러난다.

(광고책임 변호사 채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