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 한국 수사 현장에서 ‘프로파일링’은 아직 낯선 개념이었다. ‘화성 연쇄살인 9차 사건’ 당시 화성경찰서 형사였던 표창원 소장은 반복되는 미제와 참혹한 범죄 현장을 마주하며 기존 수사 기법의 한계를 절감했다. 이후 그는 영국 유학을 통해 범죄 심리와 프로파일링을 체계적으로 접했다.
연쇄살인 사건을 연구하며 표 소장은 자백과 목격 진술 중심으로 굳어진 한국 수사 관행의 구조적 문제를 꾸준히 지적해 왔다. 잇따른 재심 무죄 사건과 범죄자들의 편지, 수사 현장의 현실을 지켜보며 그는 “사람은 변할 수 있지만 그 변화를 허용할 구조와 시간·자존감을 사회가 얼마나 감당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한다. 프로파일링 도입부터 재심과 재범, 변화의 조건까지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Q. 1990년대 후반만 해도 프로파일링이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영국 유학은 어떤 계기로 결심하게 되셨나요?
A. 유학을 결심할 당시에는 프로파일링이라는 개념 자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화성 연쇄살인 9차 사건’ 당시 화성경찰서 기동대 소대장으로 근무하며 야산에서 증거물 수색을 하다가 14살 피해자의 시신을 직접 마주했습니다. 8차 사건까지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또다시 희생자가 나왔다는 사실이 제게는 큰 죄책감으로 남았습니다.
이후 부천경찰서에서 근무하며 수사를 더 잘하고 싶다는 갈증은 커졌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배울 방법은 없었습니다. 선배 형사들 역시 “경험이 전부”라는 말만 했습니다. 결국 기존 수사 기법만으로는 풀 수 없는 범죄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영국 유학을 선택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이미 프로파일링이 수사 기법으로 활용되고 있었고, 현지에서 범죄 심리와 수사 기법·프로파일링을 배우며 실제 사건 분석과 합동 근무도 경험했습니다.
Q. 경찰대 교수 시절 연쇄살인 사건을 분석하면서 기존 수사 방식과 자주 충돌했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가장 크게 느낀 한계는 무엇이었나요?
A. 한국 수사의 구조적 한계는 사법 관행과 맞물려 있습니다. 법에는 증거재판주의가 명시돼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여전히 자백과 목격 진술에 의존하는 수사가 많았습니다.
프로파일링은 과학 수사와 함께 가야 합니다. 현장 분석과 피해자 검토, 범인의 행동 증거를 종합해 사건의 성격과 범인의 성향을 먼저 정리한 뒤 수사가 진행돼야 합니다. 감정범죄인지 계획범죄인지, 초범인지 전과자인지 등을 먼저 가려내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전통적인 수사 기법은 이런 과정을 거칠 시간적 여유도 부족했고, 필요성 자체가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강력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 주변 인물 가운데 동기가 있을 법한 사람이나 알리바이가 불분명한 사람부터 좁혀 정황 증거를 확보하고, 직접 증거가 부족해도 의심이 가면 곧바로 피의자로 전환해 자백을 받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습니다.
Q. 그런 수사 구조 속에서 허위 자백 문제도 생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현장에서 이를 어떻게 보셨는지도 궁금합니다.
A. 강압이나 고문이 없더라도 수사 상황 자체의 논리 때문에 진실을 고집하는 것보다 허위 자백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순간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조건이 갖춰지면 실제로 허위 자백은 나옵니다.
설령 실제 범인이라 하더라도 충분한 현장 분석과 증거 확보 없이 송치되고, 검찰이 이를 그대로 기소하면 ‘치과의사 모녀 피살 사건’처럼 무죄 판결이 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건은 제대로 해결될 수 없는 상태로 망가집니다.
억울한 사람은 억울함이 입증돼야 하고, 진범이 따로 있다면 반드시 잡혀야 합니다. 그러나 무죄가 확정된 뒤에도 사람들은 그 억울함을 쉽게 믿지 않습니다. 반대로 실제 범인이 입증되지 않은 채 풀려나거나, 사건이 영구 미제로 남는 일도 반복돼 왔습니다.
이런 문제는 ‘춘천 역전파출소장 딸 사건’, ‘익산 약촌오거리 사건’, ‘낙동강변 살인 사건’,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습니다. 초기 수사 단계에서 문제가 발생했고, 이후 재심을 통해 사회적 경고가 이어지며 일정 부분 개선도 이뤄졌다고 봅니다.
Q. <더시사법률>에 사건 당사자들이 직접 편지로 억울함과 당시 심경을 전하고, 이를 표 소장님을 비롯한 전문가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형식의 방송을 준비 중입니다. 이런 시도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A. 그동안 TV나 유튜브에서는 수사 기록 중심으로 사건이 다뤄졌고, 정작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배제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사자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방식은 수사 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는 중요한 맥락을 담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다만 당사자의 주장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건의 유명세만 부각하면 오히려 실제로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려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나치게 무거워도 관심이 멀어집니다. 결국 균형을 어떻게 잡느냐가 핵심입니다.
Q. 평범한 사람이 강력 범죄로 무너지는 이른바 ‘심리적 붕괴점’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고 보시나요?
A. 연쇄살인범이나 사이코패스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강력 범죄는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이 맞물린 결과입니다. 분노·질투·배신감 같은 감정이 순간적으로 폭발하고, 이를 조절하지 못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핵심은 감정을 스스로 얼마나 조절할 수 있느냐, 즉 ‘감정 근력’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이 훈련을 교육과 일상에서 거의 해오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외적 압박이 더해지기도 합니다. 형사 시절 수사한 사건 중에는 사채 이자에 몰린 노점상이 극심한 모욕과 압박 끝에 폭력을 행사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전후 사정을 보면 누구라도 무너질 수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강력 범죄는 감정 조절 능력의 취약성과 견디기 힘든 외적 압박이 동시에 작용할 때 발생하며 이런 일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Q. 오랜 시간 범죄자들을 만나오시면서 사람이 실제로 변할 수 있다고 느낀 순간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A. 고3 시절 폭력 서클 아이들과 얽힌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칼을 든 아이들이 교실로 난입했고, 부반장이라는 책임감에 말리다 손에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선생님께는 “장난치다 다쳤다”고 거짓말을 했고, 그 일로 그 아이들 역시 제게 일종의 빚을 지게 됐습니다.
대신 “우리 학교 학생들은 건드리지 말고, 술·담배를 끊어라”는 조건을 걸었고, 이후 주말마다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부도 가르치며 함께 고3을 보냈습니다. 시간이 지나 보니 그 친구들 대부분이 사회 구성원으로 안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더군요. 그 경험이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체감한 순간이었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만난 범죄자들 가운데서도 출소 이후 편지를 보내와 깊은 반성과 감사의 뜻을 전하고, 이후 재범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례들을 통해 사람은 변할 수 있다는 걸 여러 차례 느꼈습니다.
변화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수십 년 동안 형성된 인식과 습관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우리 사회와 사법 시스템이 그런 변화를 위해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과연 주고 있느냐는 점입니다. 우리는 종종 기회를 주지 않은 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결론부터 내려버립니다.
Q. 재범을 끊고자 마음먹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보시는 내면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A. 무엇보다 단단한 자존감이 필요합니다. 출소 후에는 사회의 의심과 낙인·각종 차별을 견뎌야 합니다. 그때 “나는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사람”이라는 확신이 무너지면 쉽게 흔들립니다. 변화에는 티핑포인트가 있습니다. 마지막 한 방울이 차오르기 전까지는 아무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지점을 넘으면 시선이 바뀝니다. 문제는 그 직전에 포기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끝까지 버텨낼 수 있는 힘의 출발점은 결국 자존감입니다.
Q.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삶과 계획에 대해서도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열심히 살아야죠. (웃음) 이제 보니 인생이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더라고요. 많이 가질수록 결국 더 많이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거창한 계획은 없습니다. 더 이루겠다는 마음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 다해 하다가 삶의 끝에서 미련 없이 웃고 떠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