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심 늘어나는데 기록은 사라져... 형의 시효 따라 폐기되는 형사사건 기록

 


 형사사건 기록 보존, 법률 아닌 법무부령에 근거


최근 재심 사건이 잇따르고 있지만 유죄 판결이 확정된 형사사건 기록은 여전히 ‘형의 시효’를 기준으로 폐기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 인권침해와 오판을 바로잡기 위한 재심 제도가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는 수사·재판 기록의 보존이 전제돼야 하지만 현행 기록 관리 체계는 이를 충분히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6일 검찰보존사무규칙에 따르면 형사사건 기록 보존의 근거는 별도의 법률이 아닌 법무부령에 근거한다. 이 규칙은 사건 기록을 “수사·재판 및 그에 부수되는 기록”으로 정의하고 디스크·테이프·필름·영상녹화물·전자기록 등 특수매체까지 포함해 각 검찰청이 보존하도록 하고 있다. 재판이 확정된 사건이나 불기소 처분 사건 역시 이 규칙에 따라 관리된다.

 

기록 보존의 기준은 원칙적으로 ‘형의 시효’에 맞춰져 있다. 형을 선고하는 재판이 확정된 사건 기록은 형의 시효가 완성될 때까지 무죄·면소·공소기각·선고유예 사건은 공소시효 기간 동안 보존하도록 돼 있다.

 

불기소 사건 역시 공소시효 완성 시점까지가 원칙이다. 해당 기간이 지나면 기록은 심사와 심의를 거쳐 기관장의 허가로 폐기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재심 제도의 취지와 정면으로 충돌할 소지가 있다. 재심은 통상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을 전제로 진행되지만 실제 재심 준비 과정에서는 기록이 이미 ‘보존기간 만료’를 이유로 폐기돼 난관에 부딪히는 사례가 적지 않다. 재심을 준비하는 변호사들 사이에서 “기록이 남아 있느냐 여부가 재심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재심 제도와 충돌하는 기록 폐기 구조


실제로 주요 재심 사건 상당수는 기록 부재라는 벽에 가로막혔다.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은 기록 보존기간이 10년에 그쳐 사건 기록이 이미 폐기된 상태였다.

 

다행히 변호사 사무실에 남아 있던 사본 덕분에 재심이 가능했고 억울한 옥살이 끝에 무죄 판결이 선고됐다. ‘익산 약촌오거리 사건’ 역시 검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 기록이 재심의 단서가 됐다.

 

무기징역 확정 사건도 예외는 아니었다. 1993년 무기징역이 확정된 ‘낙동강변 살인사건’은 무기징역형의 시효가 20년이라는 이유로 사건 기록이 2013년 말 폐기됐다.

 

이 사건은 고(故) 삼중스님의 구명 노력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등을 통해 수사 위법과 부실 재판 문제가 공론화됐지만, 가족이 보관하고 있던 자료가 없었다면 재심 청구 자체가 어려울 뻔했다.

 

사형 확정 사건의 경우 문제는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1979년 사형이 집행된 오휘웅 씨 사건은 ‘사법살인’ 논란의 상징적 사례로 꼽히지만, 사형의 시효가 30년인 점을 고려하면 2006년 무렵 사건 기록이 폐기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뒤늦게 진상 규명에 나서더라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면 재심이나 진실 규명은 사실상 불가능해질 수 있다.


제도화되지 않은 예외, 행정 판단에 맡긴 기록 보존


모든 사건 기록이 단기간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검찰보존사무규칙은 내란·외환의 죄, 국가보안법 위반,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가중처벌 사건 등 일부 중대 범죄의 기록은 영구 또는 준영구 보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故 김성재 편 방송을 둘러싼 논란에서 김성재 사건 기록이 무죄 확정 이후 20년이 넘도록 검찰에 보존돼 있다는 사실이 주목받은 것도 이런 예외 규정에 따른 결과다.

 

문제는 이런 예외적 보존이 제도화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어떤 사건은 ‘공익적 참고 가치’를 이유로 기록이 남고, 어떤 사건은 동일한 기준 없이 폐기된다. 재심 가능성과 무관하게 기록 보존 여부가 사실상 행정 판단에 맡겨져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기록 보존의 문제는 재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과거 검찰개혁위원회는 과거사조사위원회 설치, 검찰수사심의위원회 도입, 수사기록 공개 확대 등을 권고한 바 있다.

 

그러나 과거사 조사나 종결 사건에 대한 사후 검증, 수사기록 공개 역시 기록이 온전히 남아 있어야 실효성을 가질 수 있다. 기록 보존은 단순한 ‘검찰 사무’가 아니라 국가권력 행사에 대한 사후 검증과 인권 회복의 전제라는 평가다.


보존기간 연장·소급 적용 검토해야


해외 사례와 비교하면 격차는 더욱 뚜렷하다. 일본은 사형·무기징역 사건 기록을 50년간 보존하고, 재심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보존기간이 끝난 뒤에도 ‘재심 보존기록’으로 별도 관리한다. 재심을 준비하는 당사자나 변호사가 보존을 요청할 수 있는 제도도 마련돼 있다.

 

미국 역시 주별로 차이는 있지만 장기 보존을 원칙으로 하고, 연구나 공익 목적이 인정되면 영구 보존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법조계에서는 해외 제도를 참고해 기록 보존기간을 전반적으로 늘리고, 아직 폐기되지 않은 사건 기록에 대해서는 소급 적용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010년 형법 개정으로 유기징역형 상한이 30년(가중 시 50년)까지 높아졌지만, 현행 규칙대로라면 50년 유기징역형 사건 기록도 15년만 보존한 뒤 폐기해야 하는 모순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공간과 인력 부담을 이유로 한 일률적 폐기 대신, 경미한 사건은 전자문서 형태로 전환해 보존하는 등 기록 관리 방식의 다양화가 현실적 대안으로 거론된다.

 

법무법인 예문정앤파트너스 정재민 변호사는 “기록이 오래 남아야 인권침해 사건 조사도 가능하고, 종결 사건에서 검찰권 행사가 적정했는지에 대한 사후 검증도 가능하다”며 “기록이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권력 행사를 더 신중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기록 보존 문제를 단순한 행정 관리가 아니라 사법 신뢰의 문제로 봐야 하고, 사건의 사회적 중요성과 당사자의 인권 보호를 형량해서 탄력적으로 보존기간을 설정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변호사는 “재심은 과거의 판결을 오늘의 기준으로 다시 심사하는 절차”라며 “그 출발선에 있어야 할 기록이 ‘시효’라는 관리 논리 속에서 사라지는 현실이 계속된다면 재심 제도는 구조적 한계를 안을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