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낙동강 살인사건 누명 장동익·최인철, 억울한 21년 옥살이의 기록

고문, 자백이 만들어낸 죄… 수사·재판의 강요된 선택
출소 뒤 낙인과 생계의 벽… “가족 생각하며 버텼다”

 

강압 수사 속에서 만들어진 자백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하지도 않은 범죄를 인정하는 순간, 선택지는 사라졌고 그 대가는 무기징역이라는 형벌이었다.

 

‘낙동강변 살인사건’으로 21년 넘게 복역한 뒤 2021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장동익 등대장학회 이사장과 최인철 이사는 수사 초기의 자백이 폭력과 강요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입을 모았다.

 

두 사람은 “‘예, 아니오’로만 답하라”는 압박 속에서 진술이 굳어졌고, 그 자백이 재판 전 과정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고 회상했다.

 

최 이사는 부산 사하구 을숙도에서 자연보호 감시원으로 활동하던 중 ‘3만 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됐다. 장 이사장은 두 살배기 딸을 안고 있던 집 앞에서 이름이 불린 뒤 사하경찰서로 향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교도소 안의 현실도 녹록지 않았다. 의료 공백, 과밀수용, 장기수의 고립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문제로 누적돼 있었다고 했다. 출소 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취업의 문은 좁았고, 사회의 시선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버텼다.

 

“끝까지 살아 있어야 누명도 벗을 수 있다”는 말이 유일한 버팀목이었다고 한다. 가족을 떠올리며 하루하루를 견뎠고, 결국 재심이라는 문을 열 수 있었다.


다음은 장동익, 최인철씨와 일문일답.

 

Q. 체포 당시 어떤 상황이었는지부터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최인철 이사(이하 최) 구속 당시 부산 사하구 을숙도에서 자연보호 감시원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공터가 넓다 보니 무면허 운전 연습이 많았고, 출입금지 구역 단속을 하다가 운전 연습하던 사람이 3만 원을 주더라고요. 그걸 받는 바람에 공무원 사칭이 돼버렸습니다.

 

다음 날 그 사람이 “경찰 사칭하는 사람이 있다”며 신고했고 경찰서로 끌려갔는데, 공무원 사칭 조사가 아닌 다른 사건들로 조사를 받았어요. 공무원 사칭 조사를 받고 나면 불구속으로 풀려날 줄 알았는데, 열흘쯤 지나 경찰이 강도 사건이 있었다며 저희를 지목했고, 그게 ‘낙동강변 사건’입니다.

 

열흘 정도 고문을 당했습니다. 코에 겨자를 바르고 뒤집어엎는 식이었어요. 견딜 수가 없어 결국 “알겠다”고 시인을 해버렸습니다. 검찰로 송치된 후 “저는 범인이 아니다”라고 부인했지만, 검사는 ‘경찰에서 시인해 놓고 왜 부인하느냐’고 오히려 다그쳤죠.

 

장동익 이사장(이하 장) 당시 부산에 온 지 얼마 안 된 상태였습니다. 서울에서 18세까지 살았고 파출소 문턱도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1991년 11월 8일, 낮 일을 마치고 집에 와 두 살짜리 딸을 안고 있는데 밖에서 형사들이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차에 타서 잠깐 이야기하자” 해서 따라갔고, 그곳이 사하경찰서였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보호실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다음 날 유치장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때부터 ‘낙동강변 사건’ 이야기를 꺼내며 “네가 했지”라고 몰아붙였습니다.

 

저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계속 말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거꾸로 매달아 수건을 씌우고 물을 붓는 물고문을 하는데 정신을 잃었다 깼다를 반복했습니다. 나흘 정도 겪고 나니 살기 위해 불러주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고, 그게 자술서가 됐습니다.

 

검찰로 송치된 후 검사에게 “고문당하면서 불러준 대로 쓴 것”이라고 했지만 들어주지 않았고 구치소로 들어갔습니다. 그 시기가 노태우 정권 시절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던 때였습니다. 미궁 사건 하나 해결하면 특진감이었고, 우리 사건을 맡았던 경찰관 팀장은 특진했다고 직접 자랑까지 했습니다.


 

Q. 당시 국선이 아닌 사선 변호인을 선임하셨는데, 변호인 측에서는 어떤 대응을 했습니까?

 

장 : 변호사는 두 명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검사 출신, 한 사람은 판사 출신이었죠. 사선 변호인이었지만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 흉악범 사건을 맡는 것 자체를 변호사들도 부담스러워하던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사선 변호인들도 적극적인 대응을 해주지 않았죠.

 

자술서는 경찰서에서 살기 위해 불러주는 대로 쓴 것이지만, 검찰 조사와 재판 과정에서는 줄곧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재판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판사 앞에서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라”는 말이 반복됐고, 반박하려고 하면 말을 끊겼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재판을 받는다기보다 묶인 채로 끌려 나와 앉아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1심이 끝난 뒤에는 변호사를 다시 선임하자고 마음먹었고, 항소심과 상고심 때 당시 문재인 변호사로 교체했지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죠.


 

Q. 이후 20년이 넘는 교도소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처음 교도소에 들어갔을 때의 심경은 어땠습니까?

 

최 : 당시 형이 확정된 곳이 대구교도소였습니다. 속으로는 울어도 직원들 앞에서 울 수는 없었습니다. 복도에 앉혀놓고 바리깡으로 머리를 다 미는 순간부터는 그냥 죽은 듯이 살았습니다.

 

뭘 하려 해도 할 수 없고, 억울하다고 해도 들어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재심 청구도 해봤지만 한 달 만에 “증거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됐습니다. 그 뒤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장 : 형이 확정돼도 수형자는 미지정과 지정으로 나뉩니다. 미지정은 방 안에서만 지내고, 지정은 공장에 나가 일을 합니다. 저는 방 안에만 있는 게 너무 답답해서 뭐든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당시 대구에서는 5평도 안 되는 방에 13명, 많게는 20명 넘게 앉아 있었고 여름에는 다닥다닥 붙어 ‘칼잠’을 잤습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제일 많았죠.

 

구속이 되고 상고심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진실은 밝혀진다’고 기다렸는데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법이 이런가? 세상이 왜 이래’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교도소 안에서는 생각만 자유롭지, 생각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시력이 좋지 않아 책이나 신문도 제대로 못 봤고 창밖만 내려다보며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초기에는 미지정 구역에서 약 9개월을 지냈습니다. 그때는 머릿속에 아무것도 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목탁 소리가 들려서 동료에게 물었고, 종교방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공장 출역을 신청해 인쇄공장에 배치됐습니다. 불교방에서 목탁을 배우고 예불을 하면서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Q. 감형이 결정됐던 그날의 감정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장 : 저는 교도소 안에서 자격증 하나 따본 적 없습니다. 그래서 감형은 아예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감형이 결정되자 출소 날짜가 찍혀 나오더군요. 2013년 4월 26일이었습니다. 아직 형기가 10년이나 남아 있었는데도 그날은 정말 기뻤습니다.

 

당시 가족들과 만나는 합동 접견이 예정돼 있었습니다. 어머니께 편지를 쓰기보다는 직접 만나 이야기하고 싶어서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총무과에서 “어머니가 못 오신다고 전화가 왔다”고 하더군요.

 

며칠 뒤 딸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할머니가 항암 치료 중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어머니가 내가 나갈 때까지는 기다려 주지 못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바로 눈물이 나지는 않았습니다.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서야 ‘내가 참 모질고 독한 놈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부모님 마지막 가는 길도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불효자가 됐죠.

 

아시다시피 재판 기록은 보존 기간이 지나면 폐기됩니다. 15년이 지나면 재심을 하고 싶어도 기록이 없어 시도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우리 아들 꼭 무죄는 밝혀야 한다”며 사건 서류들을 보따리에 남겨두셨더군요.

 

만약 어머니가 그 기록을 남겨두지 않으셨다면, 저는 지금도 살인자의 누명을 쓴 채 살아가고 있었을 겁니다. 재판 기록 폐기 가처분 신청 같은 제도도 있지만 당시에는 그런 제도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록들이 그대로 사라졌고, 지금도 재심을 준비하고 싶어도 기록이 없어 포기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Q. 20년이 넘는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 기억에 남는 교도관님이 있으신가요?

 

최 : 부산구치소에 있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두 번 시도했습니다. 두 번째 때는 거의 성공할 뻔했는데, 김선남 교도관님이 들어와 줄을 끊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독방 문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저와 한참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나도 네 재판을 보니까 이상한 게 많다. 그렇다고 네가 죽으면 네 누명은 누가 벗겨주냐. 가족은 평생 오명을 안고 살아야 한다.”, “내가 지금 이 일을 보고하면 너는 앞으로 가석방이든 점수든 다 불이익을 받는다. 나는 모른 척할 테니까 어떻게든 살아 나가라.” 그 말이 가슴에 깊이 남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엉뚱한 생각을 완전히 끊었습니다. 오로지 ‘살아서 나가 누명을 벗자’는 생각 하나만 붙들고 버텼습니다.

 

장 : 출소 날짜가 가까워질 즈음, 말없이 저를 지켜봐 주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보안과에 계셨던 최은사 교도관님과 한윤갑 교도관님입니다. 두 분 모두 지금은 퇴직하셨지만, 선입견 없이 저를 봐주시고 제 말을 들어주고 믿어주셨던 분들이었습니다. 그 조용한 신뢰가 큰 힘이 됐습니다.


Q. 20년을 넘게 교정시설에 계시면서 문제점을 누구보다 잘 아실 것 같습니다.

 

최 : 가장 심각하게 느꼈던 건 의료 문제였습니다. 의료 인력과 시설이 전반적으로 부족했고, 치료나 진료를 요청하면 “예산이 없다”는 말부터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만큼은 반드시 개선돼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기수의 가석방 기준도 현실에 맞게 완화됐으면 합니다. 무기수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수십 년 동안 수형 생활을 하면서 변화한 사람도 있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살아온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현행 제도에서는 사실상 가석방이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희망이 완전히 차단되면 사람은 버티기 어렵습니다. 교도소 안에서 가장 무서운 건 형벌 그 자체보다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절망감입니다. 일정한 기준과 심사를 통해 변화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는 다시 사회로 나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교정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Q. 출소 이후 사회로 돌아온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최 : 출소 이후 가장 큰 벽은 취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김 양식장에 취직해 두 달 정도 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동네에 소문이 돌더군요. “어디 안 좋은 데 다녀오셨냐”는 질문을 받았고, “맞다”고 하자 일을 관두라고 하더군요.

 

그러다 부산의 한 회사에서 일할 기회를 얻어 6년을 근무했습니다. 어느 날 상무에게 “사회가 나를 잘 안 받아주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더니 그분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게 일과 무슨 상관이냐. 착실히 살면 된다.” 그 말이 큰 힘이 되더군요.

 

장 : 시력이 좋지 않아 적응이 더 힘들었습니다. 사회가 바뀐 속도를 따라가는 일부터 막막했습니다. 휴대전화 사용법이나 요금 체계도 몰라 곤란을 겪었고, 생계를 위해 목욕탕 청소 일을 하다가도 주변 시선 때문에 오래 이어가기 어려웠습니다.

 

부산과 서울을 오가야 했던 시간도 길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무죄 판결을 받고 나니까 예전에 이상한 말을 하던 사람들이 태도가 확 달라지더군요. 그 변화가 더 씁쓸했습니다.

 


Q. 형사보상금을 수령한 뒤 ‘등대장학회’ 를 설립하셨습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습니까?

 

최 : 처음부터 뚜렷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박준영 변호사님에게 무료 변론을 받았으니 보상을 받으면 10%는 변호사님을 돕자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변호사님이 “반은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 반으로 재단을 만들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장 : 좋은 일을 하는 재단을 만들자고 했을 때, 그 대상을 학생으로 정했습니다. 어떤 단체든 좋은 일을 하더라도 정치적 해석이나 편견이 따라붙기 마련인데, 아이들만큼은 그런 편견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선입견 없이 도울 수 있는 대상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생들이 되었습니다.

 

등대장학회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에 어려움을 겪는 위기 학생을 발굴해, 진학을 위한 학자금과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또 경제적으로 힘든 가정의 학생들이 자립할 수 있고, 안정적인 생활 환경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사장 소임을 맡고 있지만 운영은 쉽지 않습니다. 개소한 지 3년 조금 넘었고, 어제 기준으로 정기 후원자는 595명입니다. 운영비 부담도 만만치 않아 이사회 비용 등은 개인 사비로 감당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도 한 푼이라도 아껴 학생 한 명이라도 더 돕자는 마음으로 이 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Q. 마지막으로, 최근에도 아크말 사건이나 장미비디오 사건의 이민형 씨처럼 재심을 준비 중인 사건들이 있습니다. 선생님들처럼 억울하게 수감돼 있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분들께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최 : 무엇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교도소 안에서 싸움 같은 일에 휘말리지 말고, 건강을 지키면서 가족 품으로 돌아가셨으면 합니다. 또 죄를 지으신 분이라면 그 사실을 외면하지 말고, 사죄하고 반성하면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지셨으면 합니다. 그 시간이 결국 자신을 살리는 시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장 : 결국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망을 키우면 결국 그 짐을 내가 짊어지게 됩니다. 버티다 보면, 사회에 나왔을 때 적어도 한 사람은 따뜻하게 맞아줄 사람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 믿음 하나로 버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