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8차 사건’은 1988년 9월 경기도 화성에서 발생한 중학생 살인 사건으로, 화성연쇄살인사건 가운데 하나로 분류돼 왔다.
당시 경찰은 현장 체모 분석 결과 등을 근거로 소아마비 장애가 있던 청년 윤성여 씨를 범인으로 특정했고, 윤 씨는 1989년 체포돼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그러나 2019년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 이춘재가 8차 사건 역시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하면서 사건은 전환점을 맞았다. 재수사와 재심 끝에 법원은 2020년 12월 윤 씨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잘못된 수사와 재판으로 인한 국가 책임을 공식 인정했다. 사건 발생 31년 만이었다.
윤성여 씨는 이 사건으로 약 2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출소는 2009년이었고, 무죄는 그로부터 11년 뒤에야 확정됐다. 등대장학회 이사로서 또 다른 사회적 약자를 돕는 삶을 살고 있는 윤성여 이사를 만나 당시 연행부터 수용 생활, 출소 이후의 적응, 그리고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질문에 대해 들어봤다.
다음은 등대장학회 이사로 활동하는 윤성여 이사와 일문일답
Q. ‘화성 8차 사건’으로 수감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느끼는 감정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A. 1989년 7월 20일이었습니다. 스물세 살이었고, 농기구 수리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경찰이 갑자기 와서 수갑을 채웠습니다. 경찰서로 곧장 간 것도 아니고, 산 쪽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습니다. 그 다음 날부터 고문이 시작됐습니다.
처음엔 몇 대 맞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틀, 사흘 지나자 거꾸로 매달더군요. “자백 받아”라는 말이 나오면 끝이었습니다. 먹지도 못했고, 물도 제대로 못 마셨습니다. 고춧가루 물고문을 당하니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그때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경찰이 불러주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찰서에서 교도소로 옮겨간 뒤에야 검사를 만났습니다. “나는 범인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검사는 “네가 안 했으면 누가 했느냐”고 말했습니다.
1심 재판은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변호인은 보이지도 않았고, 사형이 구형됐습니다. 결과는 무기징역이었습니다.
Q. 그렇게 억울한 20여 년의 수감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어떻게 견디셨습니까.
A. 1990년 5월 형이 확정됐고, 그해 가을 청주교도소로 이감됐습니다. 장애인교도소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편의시설도 없었습니다. 몸이 불편하다 보니 생활은 더 힘들었습니다. 놀림을 받거나 시비가 붙는 일도 잦았습니다. 하루 목표는 ‘오늘은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재심도 계속 시도했습니다. 스무 번 가까이 청구했지만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무죄다”라고 말해도 돌아오는 건 “더 이상 도와줄 수 없다”는 말뿐이었습니다.
억울해서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다가 제지당해 수갑과 포승에 묶인 적도 있습니다. 그때 교도소 분위기는 지금과 비교가 안 됩니다. 맞으면 맞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러다 종교를 갖게 됐고, 그나마 마음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버티다 보니 시간이 흘러가더라고요. ‘하루만 더 버티자’가 쌓여서, 어느새 세월이 지났습니다.
Q. 지금도 함께하고 계신 박종덕 교도관님을 비롯해 기억에 남는 교도관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A. 교도소에서 제 별명이 ‘무죄’였습니다. 제가 하도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하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겁니다. 그런데 그 별명이 오히려 더 안 좋게 보이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어느 교도관님은 “죄를 안 짓고 어떻게 무기형을 받느냐”고 말하던 교도관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는 사과하더군요. “그땐 몰랐다”고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청주교도소에 처음 왔을 때 김평근 교도관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저를 불러서 “면회도 없고 가족도 없고, 영치금도 한 푼 없는데…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라”라고 하시면서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종교적인 연결도 해주셨고,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처음 받았습니다. 떠나기 전에는 좋은 교도관님들도 소개해 주셨습니다.
1993년에는 박종덕 교도관님을 만났습니다. 제 무죄 주장을 끝까지 믿어준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죽을 용기로 살아라”고 말해주셨고, 제가 가석방을 나가는데 큰 역할이 되었고 출소 이후에는 일자리도 알아봐 주셨습니다.
Q. 가장 가까이에서 교정 생활을 겪으셨습니다. 수감자로서 교정 현실의 문제점도 하실 말씀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A. 가장 큰 문제는 과밀입니다. 그런데도 무기수와 장기수는 나가지 못하는 구조가 됩니다. 강력 사건이 계속 발생하면 가석방은 더 어려워지고, 무기형은 더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끝이 없는 형입니다. 30년, 40년을 살아도 못 나오는 경우가 생깁니다. 청주만 해도 직원은 60명 남짓인데 무기수는 계속 늘어납니다. 전국으로 보면 수백 명 입니다.
그 안에서 사람을 ‘끝없이 가둬두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누군가는 나옵니다. 나오면 살아야 하고, 다시 사회에 적응해야 합니다. 그 준비를 안에서부터 같이 만들어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재범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죠.
제가 아는 무기수 2명도 나와서 생계문제 때문에 7개월만에 다시 들어오는걸 봤습니다.
목사님들을 비롯해 교정위원들도 지금까지 국가 지원 없이 사비와 개인 시간을 들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장에서는 교정·교화는 교도소가 알아서 책임지고, 정부와 법무부의 제도적 지원은 거의 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교도관들도 너무 힘듭니다. 직원 두세 명이 수백 명을 상대합니다. 예전에는 근무 여건이 더 열악해 퇴근하고 바로 야근을 서고, 다음 날 또 근무를 나가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과로로 쓰러져 끝내 숨진 분들도 있었습니다.
밖에 나와 보니 다른 공무원에 비해 교도관이라는 직업이 유난히 열악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부가 교도관들의 역할과 책임에 비해 처우와 지원을 충분히 하고 있는지 국민들이 많이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Q. 출소 이후 사회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은 무엇이었습니까.
A. 교도소 안은 시간이 멈춰 있는 곳입니다. 안에서는 생활이 쳇바퀴처럼 돌아가요.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면, 아무리 교정·교화를 해도 다시 돌아오는 이유가 생깁니다.
저는 23살에 들어와 44살에 나왔습니다. 제 시간은 1989년에 멈춰 있었고, 사회는 2009년이 돼 있었습니다. 그 20년 공백을 메우는 데 6~7년이 걸렸습니다. 적응이 쉽지 않다 보니,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생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취업은 가장 큰 벽입니다. 전과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취업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기회 자체를 주지 않습니다. 신분을 숨기고 들어가도 회사에서 알게 되면 바로 끝입니다. 소문은 업계 안에서 금방 퍼지고, 한 번 알려지면 다시 취업하기는 더 어려워집니다.
Q. 결국 이춘재의 자백으로 박준영 변호사와 함께 재심을 진행하며, 수사·기소 관계자들을 다시 마주하게 됐습니다. 그때의 심정은 어떠셨습니까.
A. 당시 대공수사과 출신 경찰이 저를 범인으로 지목했습니다. 간첩을 잡던 사람이 승진 욕심으로 사건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를 교도소에 있을 때 직접 들었습니다.
그 경찰의 행적을 알아보니 두 달 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습니다. 처음에는 믿기 어려웠지만, 이후 사실이라는 말이 돌았습니다.
사건 담당자는 네 명이었는데 모두 승진했다고 들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병으로 쓰러졌고, 증인을 부르려 해도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제대로 된 증언을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다른 두 명은 법정에서 “미안하다”는 말만 했고, 이후 별다른 후속 조치는 없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일흔을 넘겼고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로 알고 있습니다.
최모 검사도 제 사건 담당자였습니다. 지금은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재심 과정에서 소환장을 보내도 몇 차례 나오지 않았고, 한 번 출석했을 때는 몸이 안 좋다며 휠체어를 타고 나왔습니다.
법정에 들어가기 전 마주쳐 “최 검사님, 저 기억하시죠”라고 물었더니 저를 모른다고 하더군요. 30년 전 일인데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제 30년의 세월은 그분에게는 기억조차 남지 않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Q. 지금은 등대장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어떤 마음에서 시작하셨습니까.
A. 제가 그런 일을 당했던 건, 결국 못 배워서 그랬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난했고,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비슷한 이유로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공부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꿈을 꿀 수 있게, 세상이 한 번이라도 기회를 줄 수 있게 돕고 싶었습니다. 저한테는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Q. 마지막으로, 지금도 억울함을 증명하지 못한 채 안에 있을지 모를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A. 결국 버티는 힘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일’이라는 희망이 없으면 사람은 무너집니다. 저도 ‘내일이 온다’는 생각 하나로 버텼습니다.
하루를 견디면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를 견디면 또 하루가 갑니다. 그게 별것 아닌 것 같아도, 결국 사람을 살립니다.
그 희망만은 놓지 않았으면 합니다. 정말로, 내일은 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가장 가까이에서 손을 내밀어 주는 교도관들이 계시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