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보이스피싱 범죄와의 연루 여부를 알지 못하고 약 4,000만 원에 가까운 피해금을 인출해 직원에게 전달한 50대 여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법조계는 서울북부지법 형사합의14부(부장판사 오병희)가 지난 15일 전기통신금융사기피해방지및피해금환급에관한 특별법 위반(방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박 모 씨(58·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전했다.
박 씨는 이른바 ‘보이스피싱’이라고 불리는 전기통신금융사기 조직원들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계좌로 입금된 피해금 3961만 3000원을 지난해 2월 26일~27일 세 차례에 걸쳐 현금 및 수표로 인출해 조직 현금수거책에 전달한 혐의를 받았다.
재판에서는 조직원들의 지시에 따른 행위가 범죄라는 사실을 박 씨가 인식했는지가 쟁점이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신용등급이 낮아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을 받는 것이 어려웠던 박 씨는 대출광고 문자메시지를 받고 연락해 조직원들로부터 대출 상담을 받았다.
박 씨는 조직원 A 씨로부터 햇살론과 저축은행 공식 앱에서 대출한도 조회를 안내받았지만, A 씨가 알려준 거짓 정보를 입력해 대출이 불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자 A 씨는 박 씨에게 편법으로 ‘작업 대출’을 받을 수 있다고 속이며 다른 조직원 B 씨를 소개해줬다.
B 씨는 박 씨에게 창업대출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며 박 씨의 계좌 정보 등을 요구했고, 계좌 거래실적이 부족해 대출이 어렵다면서 “대금 명목으로 박 씨 계좌로 돈을 입금해 거래실적을 만들어 줄 테니 그 돈을 현금으로 인출해서 회사 직원에게 다시 전달해달라”고 제안했다.
박 씨는 B 씨를 신뢰하며 대출 컨설팅 수수료와 대출 상환 방법, 대출금이 언제 들어오는지, 대출로 인해 차상위계층 지위가 변경되는 것은 아닌지 등을 자세히 문의했고 B 씨는 “불이익은 없다”라는 취지로 박 씨를 안심시켰다.
박 씨는 A 씨에게도 연락해 “혹시 통장 이력 때문에 걸리는 건 없을까”, “하도 사기대출이다 해서 통장에 이상한 작업으로 돈 넣고 빼고 하면 사기나 형사 고소당한다고 하니 겁도 난다”, “혹시나 싶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문자 했다” 등 아무런 문제가 없는지 재차 확인하기도 했다.
결국 A 씨와 B 씨의 설득에 박 씨는 지시대로 자신의 계좌에 입금된 피해금을 인출해 현금수거책들에게 전달했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 “(박 씨가)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에 의해 민형사상 책임을 부담할 가능성이 높을 것임에도 그러한 불이익을 용인하면서 별다른 금전 대가를 받지도 않은 채 본인 명의 계좌를 제공하고 자신의 신분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범행에 가담한다는 것은 일반 경험칙에 반한다”라고 판단했다.
비록 박 씨가 돈을 인출할 때 금융기관에 자금 용도를 의도적으로 숨기면서 분할 인출한 사실은 있지만, 재판부는 “보이스피싱이라는 사실을 미필적으로나마 인식했다기보다는 작업 대출 자체가 편법이기 때문에 금융기관이나 금융감독원에서 문제 삼아 대출이 실행되지 않을까 우려해 B 씨가 지시한 대로 협조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봤다.
박 씨는 피해금을 마지막으로 인출해 전달한 뒤 약속 시간까지 대출이 실행되지 않자 사기를 당한 것은 아닌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지인과 상의한 후에야 보이스피싱에 연루됐을 가능성을 인지한 박 씨는 A 씨와 B 씨에게 연락해 “혹시 내 통장이 범죄에 쓰인 건 아니냐”, “신고하겠다”라고 했고 실제로 수사기관에 자발적으로 찾아가 보이스피싱 피해자라고 신고했다.
재판부는 “당시 작업 대출이 보이스피싱 수법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일반인 입장에서 쉽게 알 수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라면서 중학교 졸업 학력으로 미용업에 계속 종사해 온 박 씨의 처지도 고려했다.
재판부는 “비록 피고인이 금융기관을 기망해 대출을 받으려 했고 그와 같이 인식한 행위 자체의 불법성이 인정된다고 해도 해당 행위와 보이스피싱 범행은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다르다”라며 “조직원들이 상당히 치밀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피고인을 기망한 점을 고려하면 피고인 역시 범죄에 이용된 피해자로 볼 여지가 있다”라고 판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