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미투 운동’이 계기가 되어 형성된 ‘성인지 감수성’ 법리는 우리나라 성범죄 판단 구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대표적으로 대법원은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특수성·맥락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때 사회구조와 성별 권력관계, 2차 피해 위험 등을 고려해야 한다” 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이후 하급심 역시 이러한 판단 기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또 다른 양상을 보게 되었 다. 성인지 감수성은 본래 실제 피해가 존재함에도 ‘증거 부족’ 이라는 이유로 보호받지 못하던 사각지대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리였다. 그런데 이 법리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에 과 도한 가중치를 부여하는 방향으 로 오남용되면서, 의도치 않게 무고한 가해자가 양산되는 부 작용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은 기억의 단편화, 트라우마로 인한 시기 혼동, 진술 과정의 왜곡 등 다양한 심리적 요인으로 인해 ‘완벽하게 일관된 진술’을 하기가 불가능하다. 나는 여러 사건에서 피해자가 겪는 이러한 현실을 수없이 보아왔다.
그러나 문제는 일관성 결여의 원인이 ‘트라우마 때문인지’, ‘허위신고 때문인지’를 구별하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성인지 감수성이 확대되면서 일부 사건은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이 부족한데도 피해자 보호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무리한 기소와 유죄 판결로 이어지는 사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목격하면서 2019년 이후 부터는 억울한 성범죄 피의자 사건을 다수 맡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모든 피의사건을 수사단계에서 무혐의 처분으로 이끌 수 있었던 이유는, 성범죄 사건의 구조적 문제를 누구보다 깊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지난날 피해자 변호를 하며 쌓인 경험은 오히려 반대 상황에서 ‘허위신고의 패턴’을 간파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다년간의 사건을 종합해 보면 허위신고 성범죄 사건에는 일정한 패턴들이 존재한다. 먼저, 교제 관계의 종료, 금전 분쟁, 직장 내 인사 갈등 등 특정 계기가 발생한 직후 신고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초기 진술과 이후 진술 간의 구조적이고 핵심적인 사항에서 불일치가 드러난다. 실제 물증 부재가 아니라 ‘부재를 설명하는 방식’에서의 비합리성도 특징이다.
예컨대 “겁이 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진술은 이해되지만, CCTV가 존재하는 장소인데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회피하는 경우 등은 다른 양상인 것이다. 피해자의 주변인에게 즉시 고지한 흔적이 없는 경우도 특징적이며 신고 이후 오히려 피의자를 압박하는 금전 요구를 하는 경우도 있다.
무고한 피의자가 무혐의·무죄를 받을 수 있으려면 단순히 “사실이 아니다”라는 무력한 부정이 아니라 ‘수사기관이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수 없는 사정들을 구조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핵심이다. 성범죄에서 피해자 진술은 가장 중요한 증거이므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분석을 ‘법리화’해야 한다.
또한 객관적 증거의 부재가 아니라 ‘부재의 사유’를 파고 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CCTV가 없는 곳이 아니라 CCTV가 존재하는 곳에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경우 또는 텔레그램·카카오톡 대화가 사라진 경위가 불합리한 경우 등은 증거 부재의 사유 자체가 허위신고를 의심하게 만드는 간접사실이 된다.
허위 신고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실제로 어떤 위압을 느꼈는지', ‘가해자가 어떤 구체적 행위를 했는지’를 정교하게 분석 하는 것도 필요하다. 관계 종료 이후의 갈등, 금전·채권 문제 등의 동기와 배경을 연결하는 정황증거를 확보하고 수사 초기 단계부터 피의자 진술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나는 피해자 변호를 주로 하던 시절 한국 사회의 성폭력 현실과 위계적 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았다. 그러나 이후 수많은 사건에서 억울하게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을 만나면 서 또 다른 진실을 보게 되었다.
피해자 보호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어떠한 법리도 한쪽만을 위한 법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형사사법은 균형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균형을 지키는 일, 반드시 보호받아야 할 피해자와 억울하게 가해자로 몰린 사람 모두의 인권을 지키는 일은 앞으로도 내가 해야 할 역할이라 믿는다. 성인지 감수성은 분명 필요하지만, 그 법리가 모든 사건에 기계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피해자의 인권이 보호되어야 하듯 피의자의 인권 역시 동일하게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 형사사법의 기본 원칙이다. 이 균형이 무너졌을 때 생기는 비극은 진짜 피해자도, 억울한 피의자도, 결국 모두를 괴롭게 만든다.
나는 성범죄 사건에서 무고함을 입증하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그것이 여러 성범죄 사건을 맡으며 내가 깨달은 책임이자 지켜야 할 정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