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에 사건을 맡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스스로 해결해 보려다 일이 점점 커지면서 변호사를 찾는 경우도 있고, 기존 변호사와 소통이 잘 되지 않아 새로 선임하는 경우도 있다.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은 대개 ‘이미 사건이 상당히 진행된 뒤’라는 점이다. 그럴 때면 나는 직원이 한 장 한 장 복사해 온 두꺼운 사건 기록을 받아 든다. 첫 장을 넘기며, 마치 과거로 돌아가 사건의 시간선을 복기하듯 읽어 내려간다. 피고인이 처음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떤 증거를 냈는지, 수사기관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살핀다. 그런데 정말 가끔, 기록을 읽다가 문득 손이 멈추는 순간이 있다. “이 증거를 왜 냈지?”, “이 말을 왜 했지?”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유리하다고 제출한 자료가 오히려 범죄를 입증하는 증거가 되어있는 경우가 있다. 변호사의 조언 없이 억울함만으로 움직이다 보면, 자신에게 불리한 자료를 스스로 내버리는 일이 생긴다. 이런 사례는 대부분 법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인터넷 정보나 주변의 조언만 믿고 사건을 진행한 경우다. 예를 들어 무고를 주장하며 제출한 녹취 속에 오히려 범행을 자인하는 듯한 취지의 말이 들어있거나, 선처를 바란다며 낸 반성문
야구에는 1점, 1점을 짜내는 ‘스몰 볼’과, 시원한 홈런 한 방을 노리는 ‘빅 볼’이라는 두 가지 스타일이 있다. 화려하고 짜릿한 빅 볼이 보기에는 더 매력적일 수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형사 재판은 ‘빅 볼’보다는 ‘스몰 볼’로 진행되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형사 재판은 단기간에 결론이 나는 절차가 아니다. 스몰 볼 전략처럼 힘들지만 끈기를 가지고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여러 과정을 거쳐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단계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변호사는 서면 작업만 하는 것에 그칠 게 아니라 재판부에 사정하여 기일을 속행해야 하고, 그 사이에 가족들은 합의금을 마련하고 피고인은 피해자에 진심 어린 용서를 구해야 하는 시간들이 필요하다. 또한 재판 과정에서는 사건의 경위와 개인적 사정을 설명하는 자료가 순차적으로 제출된다. 사건 기록을 검토하고 필요한 자료를 보완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재판부는 사건을 보다 입체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이러한 절차는 시간이 필요하고 지속적인 준비가 전제된다. 마치 홈런 한 방을 노리듯 단기간에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특정 전략에 관심을 보이는 피고인들이 있다. 그러나 형사 재판은 이미 수사 단계에서 일정한 판단을 거쳐 기소된
'불성실하다', '내 사건에 관심이 없고 잘 안 챙기는 것 같다', '열심히 안 한다', '연락도 안 된다', '처음 선임할 때와 선임한 이후가 너무 다르다'. 사람들로부터 변호사에 대한 불만을 처음 들었을 때는 이런 문제들이 변호사의 성의와 품성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직접 변호사가 되어보니 이 문제들은 상당부분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물론 예외도 적지 않으니, 모든 경우를 일반화하는 것은 아님을 밝혀 둔다). 규모가 어느 정도 있는 로펌에서 파트너 변호사들은 수임료를 받으면 로펌에 일부를 낸다. 이 돈으로 로펌은 어쏘 변호사나 비서의 월급, 사무실 임대료, 마케팅 비용, 기타 관리비를 낸다. 그리고 남은 금액의 일부를 사건을 수임해 온 변호사나 직원에게 준다. 그다음에 남은 금액을 그 일을 수행하는 변호사들이 나누는 구조다. 사건을 수행하는 변호사가 남은 금액을 가져가더라도 여기서 소득세도 공제해야 한다. 결국 주 수행 파트너 변호사조차 애초 수임료의 10%도 못 가져가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대표나 파트너 변호사들은 한 달에 일정 정도의 사건을 수임해야 집에 가져갈 생활비를 벌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시간을 쪼개
변호사가 되고 난 뒤에 보니 사무실에 ‘내 것’이 많아졌다. 공직 생활 때는 그곳에 있는 책상도, 컴퓨터도, 필통과 연필, 액자 속 그림 그리고 슬리퍼도 내 것이 아니었다. 나를 도와주는 직원들도 내가 뽑은 것이 아니고 내가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취향이 반영된 사무실에서 내가 산 슬리퍼를 신고 지낸다. 직원들도 내가 뽑았고 매달 내가 월급을 준다. 변호사가 된 뒤 또 하나 큰 변화는 사람들과 인연의 형태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공직에 있을 땐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과 인간적 관계를 맺는다기보다 ‘업무의 대상’으로 느낄 때가 많았다. 그런데 변호사가 되고 나니 나를 찾는 사람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특히나 피해자인 의뢰인이 찾아올 때면 그 인연의 소중함이 더 느껴진다. 의뢰인들은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 변호사를 찾는다. 그들은 남에게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그것은 때로 비밀이기도 하지만 비밀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믿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을 내게 털어놓는다. 내가 위로하고 믿음을 주면 피해자들은 더 큰 힘을 낸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불편함, 좌절감, 아픔을 나 역시 느낀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최근 SNS와 메신저를 통한 아동·청소년 성 착취 사건이 급증하고 있다. 가해자들은 외모 칭찬으로 접근한 뒤 점차 성적 착취 목적의 사진이나 영상을 요구하는 ‘그루밍’(grooming) 수법을 사용한다. 상담 현장에서 만난 사례들을 보면 피해 청소년들이 비교적 쉽게 가해자의 요구에 응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청소년기의 발달 특성과 디지털 환경, 사회적 요인이 맞물려 나타나는 결과다. 청소년기는 타인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발달 특성이 두드러진다. 이를 ‘상상적 청중’(Imaginary Audience)이라고 하는데, 이는 청소년들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마치 자신이 늘 다른 사람에게 주목받고 있다고 느끼는 심리적 현상을 말한다. 이 시기의 청소년들은 사소한 외모 변화나 말투, 행동까지 또래 집단이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칭찬이나 인정은 단순한 호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 결과, 외모에 대한 칭찬은 강력한 보상으로 작용하며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는 수단이 된다. 이러한 심리적 특성은 가해자의 ‘너는 특별하다’는 조작적 언어에 청소년들이 쉽게 반응하도록 만든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가해자들이 청소년의 이런
보이스피싱 사건을 상담하다 보면 “저는 보이스피싱 조직 사무실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콜을 성공한 적이 없어 피해자를 발생시킨 바 없고, 한 달 만에 귀국했으니 무죄를 주장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아예 가담하지 않은 경우’와 ‘가담 사실은 인정되나 정도가 낮은 경우’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법원은 콜을 성공한 적이 없더라도 조직에 들어가 함께 움직였다면 범죄단체가입활동죄가 성립한다고 보고 있다. 내가 아닌 다른 팀원이 콜을 성공했다면 그 결과에 대한 공모관계도 인정해 사기죄로 처벌한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는 단순 참여인지 범행 가담인지가 핵심 쟁점이 된다. 조직의 운영 방식과 내부 역할 분담 그리고 범행에 대한 인식 여부가 함께 검토된다. 실제로 다른 구성원이 범행을 실행해 피해가 발생한 경우 조직 구성원 간 공모관계가 인정되는 사례가 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관대한 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범죄 행위가 성립하는 데 있어 실질적으로 한 일이 없다”, “직접 피해를 준 적이 없다”라는 등의 이유를 내세워 스스로 ‘나는 무죄’라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법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처음부터 “나는 무죄다
피해자와 피의자의 상반된 진술만이 있는 경우, 특히 성범죄 사건에서는 대법원 판례가 말하는 바와 같이 피해자의 진술이 유죄의 유일한 증거라 하더라도 그 진술이 합리적이고 일관성이 있다면 이를 근거로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쟁점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이다. 이 과정에서 흔히 활용되는 수단 중 하나가 바로 심리생리검사, 즉 ‘거짓말탐지기’다. 이 검사는 심박수 호흡 발한 반응 등 생리적 변화를 측정해 진술의 진실 여부를 추정하는 방식이다. 진술 과정에서 나타나는 신체 반응을 바탕으로 판단한다는 점에서 과학적 검사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거짓말탐지기는 법적 한계가 분명한 수단으로 평가된다. 검사 결과는 참고 자료로 활용될 수 있으나 단독으로 유죄 판단의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 또한 검사 대상자의 심리 상태 긴장도 건강 상태 등 다양한 외부 요인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지적된다. 수사 과정에서는 이러한 검사가 권유되는 경우가 있다. 다만 검사 결과가 수사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결과 해석에 따라 진술의 신빙성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고, 한번 거짓 반응
지난주는 여섯 건의 판결선고기일이 몰려있던 주라 하루하루가 무겁게 지나갔다. 법정에 들어서기 전 그동안 쌓아온 서면과 증거, 의견서들이 과연 재판부에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으며 변호사 일의 본질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봤다. 형사재판은 짧은 선고 순간으로 기억되지만 실제로는 긴 준비 과정 위에서 이루어진다. 수사 단계에서 시작된 사건은 공판 절차를 거치며 다양한 자료와 주장으로 정리되고 재판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건의 사실관계와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 이 과정에서 변호사의 역할은 단순히 법정에서 의견을 밝히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건 기록을 검토하고 필요한 자료를 정리하며 재판 과정에서 검토될 수 있도록 내용을 구조화하는 역할이 포함된다. 특히 형사사건에서는 사건의 경위와 개인적 사정이 함께 고려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관련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사건의 맥락을 재판부에 설득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여기까지는 변호사의 업무에 가깝다. 변호사 일의 본질은 재판에 필요한 업무에 더해 또 다른 역할을 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의뢰인, 특히나 피해자의 대리인으로 형사재판이라는 긴 여정을 함께 하면서 그 시간 동안 당사자들의 불안과
별다른 일정이 없으면 나는 아침에 동네 헬스장을 방문해 간단한 운동을 한다. 이후 집으로 돌아와 사무실로 출근하는 게 일상이다. 공직에 있을 때는 출근길 차 안에서 항상 뉴스를 틀어놨지만 지금은 주로 팝이나 가요 같은 음악을 듣는다. 왕복 8차선을 지나 사무실 건물에 도착해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엘리베이터에 버튼을 누르면 비로소 변호사로서의 하루를 시작하는 버튼을 누른 것 같다. 사무실에 출근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음악을 틀고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창밖 너머로 검은색 블랙박스처럼 생긴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청사도 보인다. 늘 같은 건물이었을 터인데 최근 검찰권이 약화되면서 어쩐지 과거보다 건물이 작아져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요즘 나를 보면 첫 마디가 대개 “변호사 되니 좋아?”이다. 나는 “자유여행을 하는 것 같아서 좋다”고 대답한다. 공직에 있을 때는 실제보다 더 반듯한 사람인 양 신뢰 받았었다. 일은 마치 패키지여행의 일정표처럼 세세하게 정해져 있었다. 공직 생활을 하며 구사할 수 있는 선택지는 첼리스트가 연주하는 음악 선율처럼, 화가가 붓을 들고 캔버스 위에서 구사하는 색조처럼 다양하고 풍부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지
2010년 4월 기관에서 인사와 징계 업무를 맡게 되면서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징계자가 발생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2007년부터 2010년 3월까지 3년 동안 소년수 폭행 사건, 도주 사건, 복지과 비리 사건 등 여러 일로 30여 명의 동료가 징계를 받았다. 징계를 받은 직원들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며 그 일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기관은 다른 곳에 비해 징계가 유독 많았다. 법무부에 최근 3년간 징계 현황을 보고할 때 담당자가 전화를 걸어 “자료가 잘못된 것 아니냐. 한 기관에서 3년 동안 30명 넘게 징계를 받는 경우가 있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다행히 내가 인사와 징계 업무를 맡은 뒤 약 2년 동안은 단 한 건의 징계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친한 동료가 찾아와 잠깐 보자고 했다. 밖으로 나가 보니 음주운전에 적발됐다는 것이었다. 식당에서 반주를 하던 중 식당 앞에 주차된 차를 잠깐 빼달라는 요청을 받고 몇 미터 이동했는데 그때 단속에 걸렸다는 것이다.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2년 만에 발생한 징계 건이 하필 이 친구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두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