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진행한 상담 중 쉽게 잊히지 않는 사건이 있다. 상담자는 항소심에서 거액의 합의금을 마련해 피해자 대다수와 합의를 했다고 한다. 이런 경우에는 누구나 집행유예까진 몰라도 적어도 감형은 될 것이라고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고 한다.
“범행의 중대성을 고려할 때, 합의를 했어도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라며 항소를 기각했다는 것이다. 상담자는 상고를 해서라도 결과를 바꿀 수 없겠냐고 했는데, 가능성이 높지 않기에 기대하시는 답변을 드리지 못했다.
변호인 접견실을 나오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대다수 피해자와 합의를 했음에도, 단 1일의 감형도 허락되지 않은 이 판결 앞에서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것이 정의로운 판결인가?”
요즘은 사회 전반에 걸쳐 ‘엄벌주의’가 하나의 시대정신처럼 자리 잡고 있다. 범죄 뉴스가 보도되기만 하면 댓들 창에는 빠짐없이 “무조건 세게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줄을 잇는다. 언론도 분위기를 부추긴다. ‘합의로 형량을 줄이는 시대는 지났다’, ‘공탁으로 감형받는건 안 된다’는 식의 논조가 공공연히 소비된다.
이러한 기류는 이제, 실제 판결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공탁’만 했을 때는 감형 효과가 많이 떨어지고 있음이 체감되고, 심지어는 ‘합의’를 해도 반드시 감형을 장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위 상담자가 그런 사례다. 그런데 이처럼 용서 없는 판결이 과연 정말로 피해자를 위한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공탁이나 합의를 해도 감형이 되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피고인이 피해자를 위해 손을 내밀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형사재판이 피해자의 피해회복을 중시한다면, 그 회복을 위한 피고인의 노력은 반드시 평가받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가고 있다. 합의든 공탁이든, 형량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피고인은 결국 피해자에게 쓸 돈을 그냥 다른데 쓰자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요즘은 처벌불원서가 제출된 사건에서도 재판부가 “피해자의 진정한 의사에 따른 합의인지 의심스럽다”며 양형에 반영하지 않는 사례들도 적지 않게 보인다.
그러나 재판부가 그런 의심을 품었다면, 판결문 마지막 페이지에 “의심스럽다”고 기재할 것이 아니라, 재판 과정에서 확인하는 것이 마땅하다. 피해자를 법정에 출석시켜 진정한 의사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이러한 절차 진행 없이 판단을 내리는 건, 형사재판의 대원칙인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한다’는 원칙과도 정면으로 어긋난다.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피해회복을 위해 노력한 피고인과, 그렇지 않은 피고인 사이에는 반드시 결과에서 차별점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재판을 받는 이들에게 어떤 태도가 책임있는 행동인지, 무엇이 바람직한 방향인지 명확하게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 피고인이 ‘어차피 감형이 안 된다면 굳이 공탁을 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되면, 결국 피해자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방향은 아닐 것으로 생각 된다.
용서를 무시하는 판결이 쌓일수록, 피해회복을 위한 노력은 점점 줄어든다. 엄벌이 무조건 정의가 되는 사회는 정작 피해자를 위한 사회는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