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청]새로운 증거는, 이미 기록 속에 있었다

은 주장은 ‘항소 기각’으로 이어져
새 증거 없다면 전략을 바꿀 필요도
검토된 기존 증거 면밀히 살펴야...
실마리 찾는 것은 변호사의 몫

 

1심에서 무죄 주장을 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항소심에서 다시 무죄 주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새로운 증거’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여러 번 드린 적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증거란, 꼭 기존의 증거 기록에 없는 바깥에서 뭔가를 찾아서 가져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기존 증거 기록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미 1심에서 검사가 제출한 증거 기록에서도 모두가 놓쳤던 단서를 찾아낼 수 있다.

 

1심에 출석한 증인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증인이 거짓말을 한 경우, 항소심에서 다시 불러 다투어서 원심 법정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점을 밝혀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새로운 증거’가 되고 무죄를 받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실제로 필자가 과거 변론했던 사건 중에도 1심 증거 기록 속에서 새로운 증거를 찾아내 판결을 뒤집은 사례가 있었다.


그 사건 의뢰인은 여러 개의 계(契)를 운영하면서 고소인으로부터 계불입금을 받았는데, 이를 반환하지 못해 사기죄로 재판을 받게 됐다.


그런데 정상적으로 운영된 계도 있었기에, 해당 계불입금은 무죄를 다투어야 했다. 문제는 양측 사이에 금전 거래가 너무 복잡하여 무죄를 주장해야 하는 이체 내역을 특정하기 어려웠다는 점이었다.


의뢰인은 이미 1심 변호사를 통해 같은 주장을 했지만 전부 유죄 판단을 받았다. 하지만 여러 번 접견 상담을 해볼수록 필자는 의뢰인의 주장은 진실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래서 어렵겠지만 항소심에서도 억울한 부분에 대해 다시 무죄를 다퉈보기로 했다.

 

이 사건은 두 가지 난관이 있었는데, 하나는 외부에서 새롭게 찾을 증거가 없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소인이 이미 1심에서 증언했기 때문에 항소심 재판부가 증인 채택을 해 주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었다. 항소심은 재판의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한 증인 신청에 대해 기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필자는 수사 당시 고소인의 진술과 법정 증언을 토씨 하나까지 대조해가며 분석했고, 말이 바뀐 지점을 전부 찾아냈다. 이 덕분에 항소심 재판부를 설득해 고소인을 다시 증인으로 부를 수 있었다. 첫 번째 난관은 넘은 것이다. 하지만 다시 출석한 고소인이 또 거짓말을 하면 소용이 없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기록을 펼쳐 읽고 또 읽었다. 복잡한 계좌 거래 내역에서, 우리가 무죄를 주장하는 부분과 그 외 입금된 내역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같은 페이지를 수십 번 넘겼고, 혹시라도 놓친 포인트는 없었는지 집요하게 되짚었다.

 

당시 고소인은 수많은 이체 내역마다 비고란에 일일이 수기로 거래 명목을 적어두었는데 재판부는 그 점을 근거로 고소인의 진술에 상당한 신빙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러다 믿기 힘든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무죄를 주장한 특정 거래들에만, 고소인이 꼼꼼히 적어둔 ‘비고’란에 다른 거래에서는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점’이 찍혀 있던 것이었다. 단순한 오타나 출력 흔적이 아니라, 손으로 찍은 의도된 구별의 흔적이었다.

 

변호인은 복사본으로 기록을 검토하기 때문에 이런 미세한 표식을 놓치기 쉽다. 그 점을 발견한 순간, 나도 모르게 책상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마침내 진실에 다가갈 실마리를 손에 넣은 것이다.


수많은 이체 내역 가운데 특정 거래에만 존재하는 표식이라는 점은 의도적 구분의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고, 이는 고소인의 진술에 결정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원고가 곗돈을 정상적으로 운영하지 않았다’는 고소인의 주장과 달리, 일부 거래에는 정상적인 계 운영의 증거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를 근거로 고소인의 진술 전반에 대한 신빙성을 정면으로 반박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그렇게 결정적 단서를 손에 쥔 나는 이를 정리해 재판부에 제출했고, 이어진 증인신문에서도 고소인을 매섭게 추궁할 수 있었다. 고소인은 ‘점’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놓지 못했고, 법정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 증인신문이 끝나고 나서 필자의 모습을 보니 셔츠 소매가 거의 끝까지 올라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법정에서 재판에 몰입했던 것이다. 재판 결과는 기대했던 대로 뒤집혔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에서 인정되지 않았던 부분에 일부 무죄를 선고했고, 형량도 크게 줄었다. 이 사건은 이미 검토된 기록 안에도 진실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무죄를 이끌어 내는 힘은 대단한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미 나온 증거와 증언 속에서도 진실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그것이야말로 변호인의 집요함이고, 항소심에서 판결을 바꾸는 진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