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법.알.못 상담소’ 코너에서는 성범죄 사건에 연루되어 수사나 재판을 받게 된 분들이 자주 하시는 질문들에 대해 짚어보려 합니다. 성범죄 사건은, 변호사인 제가 경험하기에도 무죄가 인정되는 기준이 매우 높은 편입니다. 그래서 ‘이 정도면 무죄를 받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셨던 분들이, 실제 재판에서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를 받아 당황하시는 경우를 저희는 많이 봐 왔습니다.
이처럼 예상하지 못한 판결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법원이 성범죄 사건을 어떤 관점에서 판단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법원의 판단 기준과 접근 방식에 대해 가능한 한 쉽고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지금 이 글이 성범죄 사건에 연루된 분들이 사건의 방향을 잡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Q. 저는 지금 강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피해자 쪽에서, 처음 조사를 받을 때는 모텔에 갈 때 제가 팔을 잡고 있었다고 했는데, 나중에 검찰 조사를 받을 때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팔과 허리를 잡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진술이 달라지는 부분들이 많은데, 진술 신빙성이 없다고 다퉈서 무죄를 받을 수 있을까요?
A.상대방과 서로 합의 하에 성관계를 했는데, 갑자기 상대가 전혀 다른 주장을 한다면 그 억울함은 겪어보지 않은 이상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상담자의 질문과 관련해 꼭 알고 계셔야 할 중요한 판례가 하나 있습니다. 대법원은 “피해자의 진술이 일부 바뀌었다고 해서, 그게 사건의 핵심 내용을 부정하는 수준이 아니라면 신빙성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는 판단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대법원 2018도4279 판결).
이 사건의 피고인은 공군 중령이었고, 부하 여군을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피해자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추행당한 부위를 ‘손’, ‘손과 무릎 부위’, ‘무릎 부위’라고 하거나, 추행 부위에 허리를 추가하기도 하는 등 진술이 계속해서 조금씩 바뀌었는데요. 2심 재판부는 “자신이 어떻게 추행을 당했는지에 관한 중요한 부분의 진술이 모순된다”며 무죄를 선고했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피해자가 긴 시간 동안 반복 진술을 하며 기억을 더듬는 과정에서 일부 표현이나 순서가 달라질 수는 있고, 특히 사건의 본질이 아닌 사소한 주변 사항에 대한 진술이 달라졌다고 해서 전체 진술이 신빙성이 없다고 볼 수는 없으며, 중요한 진술의 흐름과 핵심 내용이 일관된다면, 진술의 신빙성은 여전히 인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담자가 변호인과 무죄 전략을 세울 때 주의하셔야 할 점은, ① 증인신문 과정에서 너무 사소한 진술 변화에만 집착해서 질문하는 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고, ② 그런 질문은 증인신문 초반부에 배치해서 증인의 심리를 흔들고 재판부에 ‘믿기 힘든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는 정도로 활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③ 그 외 핵심 부분에 대한 질문이 주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Q. 저는 지금 준강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정말 억울한데, 피해자가 사건 다음 날에도 저한테 별다른 항의도 안 했고, 오히려 먼저 연락해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습니다. 저로선 이런 행동이 ‘정말 강제로 당한 사람인가?’ 싶습니다. 이런 점을 강조하면 법원에서 신빙성을 의심해주지 않나요?
A. 성범죄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이 상식적으로 피해자답지 않아 보이는 행동을 보였다면, 이는 재판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꼭 기억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단지 “피해자답지 않다”는 주장 하나만으로는 무죄를 받아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법원은 성폭력 사건을 심리할 때 ‘성인지 감수성’을 갖고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대법원 2019도2562).
실제로 판사들은 피해자가 사건 이후에도 피고인에게 먼저 연락했다거나, 평범한 대화를 이어갔다고 해서 곧바로 “그럼 성범죄는 아니었겠네”라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폭력 피해자는 충격과 두려움으로 인해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거나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가해자와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을 느낄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전에 상담한 사건 중에도, 아청법위반죄(강간등치상)로 기소된 피고인이 피해자답지 않은 행동을 지적했다가 오히려 중형을 선고받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당시 피고인 측 변호인은 범행이 이뤄졌다는 장소가 폐쇄적이지 않은 ‘룸카페’였다는 점에 주목, 피해자가 정말로 범죄를 당했다면 얼마든지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이를 모두 배척하고, 무려 ‘징역 7년’을 선고했습니다. 당시 1심 변호사님이 검사 출신 전관 변호사였음에도 상황 판단을 잘못하신 것인데, 그만큼 요즘 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보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런 조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피해자답지 않다”는 것만 주장하는 전략은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성인지 감수성을 간과한 방어로 역효과가 날 수도 있으므로, 이런 부분도 마찬가지로 증인신문 시 부수적인 질문으로 활용해야 하고, 진술이 객관적인 증거와 충돌하는 지점을 조목조목 짚어내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효과적인 전략입니다.
Q. 저는 지금 성폭력처벌법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고소인 주장 중에는 다소 억울한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인정하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피해자와 합의를 진행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요즘 성범죄 사건 합의금액이 높게 시작된다고 하는데 그 부분도 걱정되고요. 어떻게 해야 합의를 잘 할 수 있나요?
A.이 부분은 실제 많은 성범죄 사건에서 합의를 성공한 경험을 토대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사기, 횡령 같은 경제범죄에 비해 성범죄 사건의 합의 난이도가 더 높은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요즘은 누구나 조금만 검색해 보면 ‘합의금으로 얼마를 받았다’는 글도 쉽게 검색해 볼 수 있으니, 대략 시세도 형성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직접 접촉을 피하고, 진정성 있는 태도로 접근해야 하고…. 이런 조언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 따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꼭 조언해 드리고 싶은 것은, “지나치게 여유 없이 진행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피해자와의 합의도, 양 당사자가 의견을 조율하는 일종의 협상입니다. 그런데 한쪽이 지나치게 저자세이거나 초조한 모습을 보인다면, 성사될 수 있었던 합의도 무산되고 말 것입니다.
상대방의 반응이 없다고 해서 무작정 계속 연락을 하거나, 처음부터 갖고 있는 금액 전부를 제시하는 건 좋은 전략이 아닙니다. 중요한 건, 상대방도 ‘굳이 민사로 가서 시간·비용 들이는 것보다 지금 선에서 정리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게끔 유도하는 것, 그 흐름을 잘 만드는 것이 관건입니다.
성범죄 사건과 관련된 질문들이 더 많지만, 우선 이렇게 ‘죄명’에 불문하고 많이 들어오는 TOP 3 질문을 추려서 답변을 드렸습니다. 항상 ‘이론적인 내용’은 빼고, ‘실무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여러분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의 건승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