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화기를 분사한 행위가 특수폭행에 해당될까? 최근 법원이 이를 특수폭행으로 인정하면서 ‘위험한 물건’의 범위와 정당방위 한계에 대한 기존 판례 입장을 재확인했다. 단순히 피해자의 신체에 직접 접촉했는지가 아니라, 행위의 방식과 사회상규 위반 여부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한 것이다.
2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남부지방법원 형사11단독 정성화 판사는 지난 19일 특수폭행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벌금 1천만 원을 선고했다.
사건은 지난해 6월 서울 구로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발생했다. 당시 A씨는 건물 2층 베란다에서 유치권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던 피해자 3명이 사다리를 이용해 외벽을 타고 올라오자, 소화기를 여러 차례 분사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소화기 분말을 흡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행 형법 제261조는 “단체 또는 다중의 위력을 보이거나 위험한 물건을 휴대하여 폭행을 가한 경우”를 특수폭행으로 규정하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법원은 A씨가 사용한 소화기가 사용 상황에 따라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에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물건’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판례는 소화기뿐 아니라 일상적인 물건도 ‘위험한 물건’으로 폭넓게 인정해 왔다. 2024년 창원지방법원은 피고인이 피해자를 향해 소화기를 집어 던진 사건에서 소화기를 위험한 물건으로 판단했고, 2022년 제1지역군사법원은 음료수가 가득 찬 페트병을 피해자의 머리 방향으로 던진 행위를 특수폭행으로 인정했다. 이처럼 법원은 사안에 따라 물건의 원래 용도보다 사용 방식과 결과적 위험성을 중시하고 있다.
A씨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행위가 정당행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피해자들이 부당한 유치권을 내세워 물리력을 행사하려 했고, 추락사고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항변했다. 이어 “법령에 의한 행위나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행위는 처벌하지 않는다”고 규정한 형법 제20조를 근거로 위법성이 조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양측이 오랜 기간 유치권 갈등을 빚은 것은 사실로 보이나, 소화기를 분사한 행위가 사회 통념상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이 무모하고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오피스텔에 들어오려 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된 측면은 있다”라면서도 “범행 수법과 위험성을 고려하면 죄책이 무겁다”고 밝혔다.
법무법인 민 유정화 변호사는 “소화기 분사는 피해자의 신체 안전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행위로, 법원은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범위를 매우 엄격하게 판단한다”며 “정당행위가 성립하려면 방어의 필요성과 상당성이 인정돼야 하는데, 이번 사건은 그 한계를 넘어섰다고 본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