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시사법률 김혜인 기자 | 보이스피싱 조직의 지시에 따라 피해자가 현관문 손잡이에 걸어둔 현금 4000만 원을 가져갔더라도 사기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이는 피해자의 재산 처분 의사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대법관 노경필)는 사기 혐의로 기소된 A씨(53)에 대해 일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2심 판결에 법리 오해 등 잘못이 없다"고 밝혔다.
A씨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수거책으로 활동하며 피해자들로부터 총 8000만 원을 빼돌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조직원들은 피해자들을 속여 아파트 현관문 등 특정 장소에 현금을 두게 했고, A씨는 이를 회수해 일부를 자신의 몫으로 챙겼다.
1심 재판부는 A씨의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해 징역 10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A씨가 범행에 가담한 점과 피해 규모가 크며, 피해자들과 합의나 피해 회복 조치도 없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2심에서는 일부 혐의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며 감형됐다. 2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현관문 손잡이에 현금을 걸어둔 사건과 관련해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봤다. 피해자가 속임수에 의해 착오로 재산을 처분했다는 사기죄의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2심 재판부는 "피해자는 현금을 완전히 인도한 것이 아니라 필요 시 확인이 가능한 상태였으며, 누군가 이를 가져갈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며 "이는 재산 처분 의사가 없는 상황으로 사기죄가 성립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대법원도 이 같은 판단을 유지했다. 법조계에 따르면, 검찰이 사기 혐의 외에 절도 혐의를 예비적으로 공소사실에 포함했다면, 유죄 선고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예비적 공소사실이란 주된 혐의가 인정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다른 혐의로 판단을 구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검찰이 이를 추가하지 않아 절도죄 적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법조계는 이번 판결이 사기죄와 절도죄를 구별하는 기준에 대한 법적 논의를 재점화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