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상황에서 변호사가 필요한 이유

성범죄 사건은 진술 싸움인 경우 많아
‘증명 다툼’으로 전환하는 것이 변호사
감정적 시각으로 보기 쉬운 영역이지만
변호사는 이를 증명의 자리로 되돌린다

 

성범죄 사건을 맡을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속도’다. 사건은 빠르게 굳어지고, 한번 굳어진 인상은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객관적 물증이 부족한 경우에는 진술이 전부인 경우가 많고, 그 진술이 곧 사건의 프레임이 된다. 그 프레임이 사실관계의 촘촘한 확인보다 ‘분위기’와 ‘감정’쪽으로 먼저 달려갈때 문제가 생긴다. 변호사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상대의 말을 무조건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이 사실과 정합적인지, 법이 요구하는 요건을 충족하는지, ‘증명’의 기준에 따라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번 사건도 출발할 당시에는 당사자 간 진술이 엇갈리는 ‘진술 대 진술’ 상황이었다.

 

의뢰인은 캠프에서 알게 된 여성과 술 을 마신 뒤, 피해자가 만취해 항거불능 상태에 이르렀음을 이용해 간음하려 했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 공소사실의 요지는 이렇다. 의뢰인이 피해자를 방으로 데려다주는 과정에서 침대에 눕히고 성적 행위를 시도했으며, 잠에서 깬 피해자가 이를 거부해 준강간 미수에 그쳤다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사건에서 가장 위험한 함정은 피해자 진술을 무조건 거짓으로 치부하며 부정하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변호인의 역할은 그 사이에서 법이 요구 하는 질문을 끝까지 붙들고 가는 것이다.

 

사건 당시 피해 자가 과연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였는지, 그리고 설령 일부 그런 상태였다 하더라도 피고인이 이를 인식하고 이용했다고 볼 수 있는지. 말하자면 ‘상태’와 ‘인식’ 이라는 두 개의 요건을 차분히 분리해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필자는 피해자의 사건 전후 행동을 면밀히 살폈다. 피해자는 어두운 시골길을 스스로 걸어 이동했다. 이동 중 있었던 일과 이동 경로 등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피해자의 자발적 협조가 없으면 설명하기 어려운 이동 동선이었다.

 

필자는 추가적인 산책 과정에서 일정 부분 술이 깼을 가능성, 블랙아웃으로 기억이 부분적으로 단절됐을 가능성도 함께 검토했다. 이 모든 정황이 하나의 결론을 곧장 말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전면적인 항거불능’이라는 단정 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경고를 준다.

 

또 하나의 핵심은 두 당사자 간의 접촉이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해 강제로 이루어진 것’과는 거리가 있음을 소명 하는 일이었다. 필자는 수집한 자료를 분석해 일부 성적 접촉에 동의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성관계 단계에 이르자 피해자 측에서 거부 의사를 표시했으며 그 즉시 행위가 중단됐다는 사정을 설명했다.

 

1심 법원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여 피해자 진술만으로는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와 이에 대한 피고인의 인식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봤고, 결국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사건은 여기에서 종결되지 않았다. 검찰이 항소를 제기한 것이다. 항소의 근거는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과 피고인의 사과 메시지였다.

 

항소심에서 필자는 새로운 증거 없이 판단을 뒤집으려면 1심의 증거 평가에 명백한 오류나 논리·경험칙상 현저한 불합리성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붙들었다. 형사재판의 ‘사실인정’은 후견적 추정이 아니라, 법관이 법정에서 확인한 증거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사과 메시지의 경우 문맥과 전체 대화 흐름 속에서 그것이 범행을 인정 하는 취지라기보다 상대방에게 불편함을 준데 대한 도의적 표현이라는 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성인지적 관점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점 역시 ‘검증된 신빙성’ 위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항소심 법원은 1심 판단을 변경할 만한 새로운 사정이 없다고 보고 검찰의 항소를 기각했다. 특히 피해자가 성관계를 거부했다는 사정만으로 그 이전에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였다고 추정할 수 없다고 명확히 밝혔다.

 

이 사건을 통해 필자는 변호사의 역할이 ‘승소’라는 결과로만 설명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불리한 프레임이 먼저 자리를 잡을수록, 차분한 검증의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양측 진술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법이 요구하는 요건과 증명의 기준으로 다시 사건을 세우는 과정, 그 과정을 수행하는 것은 사건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제 삼자이자 법조 전문인이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필자는 이것이 ‘변호사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성범죄 사건은 감정의 언어가 먼저 튀어나오기 쉬운 영역이다. 그래서 더더욱 절차와 증거, 요건의 언어가 필요하다. 누구든지 자신의 인생에서 단 한번도 법정에 설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만약 그 순간이 온다면, 사건을 ‘감정’이 아니라 ‘증명’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사람이 필요하다. 변호사의 일은 그 자리에서 시작하고, 그 자리를 지키는 데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