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선생 암살범 향한 역사의 응징…박기서 씨 별세

 

1996년 10월 23일 새벽, 경기도 부천의 한 아파트 단지.

 

시내버스 운전기사 박기서(당시 49세) 씨는 비장한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허리춤에는 ‘정의봉’이라 새겨진 40㎝ 길이의 나무 방망이가 숨겨져 있었다. 10여 년간 품어온 결심을 실행하는 날이었다.

 

박 씨의 시간은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연히 읽은 『백범일지』를 통해 그는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백범 김구 선생을 ‘위대한 지도자’로 마음속에 새겼다. 호(號) ‘백범’이 ‘백성’과 ‘범부’에서 유래한 겸허함은 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반면 1949년 경교장에서 김구를 권총으로 암살한 안두희(당시 79세)는 ‘민족 반역자’였다. 암살 후에도 그는 실질적 법적 처벌 없이 군납업체를 운영하며 노년을 보냈다.

 

1994년 박 씨는 수첩에 “안두희를 자연사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고 적었고, 1995년 김구 49주기 추모제에서 백범기념관 유품을 바라보며 결심을 굳혔다. 과거 안두희를 폭행했던 권중희 씨에게서 거처를 확인한 뒤, 인천 중구 아파트 구조를 익히고 방망이·나일론 줄을 준비했다.

 

휴무일이던 범행 당일, 아내에게는 “대전으로 등산 간다”고만 남기고 집을 나섰다. 부천에서 인천으로 이동해 오전 5시 30분쯤 아파트에 도착한 그는 6시간을 기다렸다. 안두희의 동거인이 현관문을 열자 밀치고 들어가 나일론 줄로 묶었다.

 

박 씨는 안두희를 향해 “김구 선생을 시해한 너를 죽이러 왔다”고 말한 뒤 정의봉으로 머리와 몸을 내리쳤다. 안두희는 경부·흉부 손상으로 사망했다.

 

박 씨는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한 뒤 경찰에 자수하며 “역사를 향한 최소한의 양심”이라고 진술했다. 1심 재판부는 “안두희가 특정 세력의 비호를 받았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며 징역 5년을 선고했다.

 

2심에서는 “국민적 분노가 범행 동기에 반영됐다”며 징역 3년으로 감형됐고,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해 형이 확정됐다. 박 씨는 1998년 3·1절 특사로 석방됐다.

 

출소 후 박 씨는 버스·택시 운전사로 생계를 이어갔으며, 지난 7월 10일 지병으로 향년 78세를 일기로 부천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 그의 상징인 정의봉은 현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돼 보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