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지인에게 알렸다가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처벌받은 사례가 광주에서도 처음 확인됐다. 전남 영암에서 발견된 사례에 이어, 일제가 강제동원 실상을 은폐하기 위해 주민을 형사처벌하며 입단속한 직접 증거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5일 뉴스1에 따르면 1938년~1941년 사이 광주지방법원에서는 다수의 피고인이 위안부 관련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1938년 9월 28일, 김금례 씨는 화순의 과부 지인에게 “전쟁 중인 곳에 큰 건물을 지어 과부를 끌고 가 창녀로 만든다”고 말했다가 금고 4개월을 선고받았다. 지인이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지만, 김 씨는 우려를 거두지 않았고, 이 발언이 퍼진 것이 처벌 사유가 됐다.
같은 해 10월 7일, 화순 거주 나명주 씨는 가게 앞에서 만난 지인 8명에게 “16세 이상 처녀를 전쟁터로 보내 밥을 짓게 하거나 세탁을 시키고 있다. 광주에서도 4명이 갔다”고 전했다. 이어 “장성에서도 처녀를 전쟁터에 보내려 호구조사 중”이라고 덧붙였다가 역시 금고 4개월을 선고받았다.
광산군에서 기름행상을 하던 임자근이 씨는 지인 송규녀 씨에게 “혼기 아가씨 명단과 연령을 조사해 중국 전쟁터로 보내 병사의 위문·취사·세탁에 부역시키려 한다”고 말했고, 송 씨가 이를 마을에 전파해 두 사람 모두 금고 4개월형을 받았다.
옷감행상 김금순 씨는 “시골에서 아가씨·과부·첩을 강제로 전쟁터에 끌고 가 세탁·재봉·취사 등을 시킨다”는 말을 지인에게 전했고, 이 내용은 여러 사람을 거쳐 퍼졌다. 결국 김 씨와 발언을 전달한 정심이 씨, 정금이 씨 모두 처벌됐다.
1941년 김송죽 씨는 세입자 정점례 씨로부터 “순사가 딸의 호구조사를 했다”는 말을 듣고, “총독부가 조선인 처녀를 강제 모집하고 있으니 딸을 숨겨라”고 조언했다가 유언비어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부는 김 씨가 이를 빌미로 가사노동을 얻으려 했다고 판시했다.
이 밖에도 ‘처녀 대상 공출이 잦다’는 발언 등으로 다수의 주민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는 일제가 위안부 제도를 은폐하고 관련 사실을 알리려는 사람들을 처벌하며 조직적으로 강제동원 사실을 숨겼음을 보여준다.
당시 일제는 전쟁 동원을 위해 한국인을 철저히 감시했다. 1937년 7월 ‘국민정신 앙양과 시국 인식 강화’를 명목으로 조선중앙정보위원회를 설치하고, 각 도에 정보위를 두어 여론과 동향을 파악했다. 경찰과 행정기관도 대중 통제에 동원돼 위안부 강제동원 실상을 알리는 행위는 극도로 위험했다.
비슷한 사례로 1938년 경남에서 유언비어 유포로 처벌받은 장인식·장복학 씨는 2020년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광주의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위안부 실상을 알린 행위는 사실상의 독립운동”이라며 “이번에 확인된 광주의 처벌자들도 명예회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국민들이 처벌 위험 속에서도 서로를 경고하고 구하려 했다는 사실을 오늘의 국민과 청소년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