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포항에서 형사사건을 가장 많이 맡는 변호사 중 한 사람이다. 수사 초기부터 법정 대응, 국민참여재판까지. 하루에도 수십 건의 사건을 들여다보며 사람들의 말과 표정을 읽는다.
어느 날, 한 중년 남성이 내 사무실을 찾았다. 그의 첫 마디는 “변호사님, 저는 정말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였다. 그는 동호회 모임에서 알게 된 여성과 술자리를 가졌고, 서로 좋은 감정이 오간 뒤 자연스럽게 관계를 가졌다고 믿었다. 하지만 다음 날 여성의 태도가 돌변했고, 며칠 뒤 그는 준강간 피의자로 소환되었다.
이 사연에서 가장 안타까운 건, 그가 이미 수사를 홀로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본인은 결백하기 때문에 모든 사실을 수사기관에 털어놓았다고 했다.
그 말은 나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법적 조언 없이 수사기관에 모든 것을 털어놓게 되면 스스로를 불리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진술도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남성의 경우 대화녹음, 영상, 메시지 등 물증도 없었다. 오직 피해자라 주장하는 여성의 눈물 어린 진술 하나만 존재할 뿐이었다. 나를 찾아오기 전 몇몇 로펌을 다녀봤지만 모두 ‘입증이 어렵다’, ‘사건이 어렵다’는 대답만 할 뿐이라고 했다.
물론 내 생각에도 입증이 어렵고 결과에 따라 변호사라는 이름에 상처가 남게 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누구든 법 앞에서는 정당하게 방어받을 기회를 가져야 함을 떠올렸다. 이 남성의 사건을 모른 척 한다면 스스로 법조인이라 불릴 자격을 잃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 내가 주저 없이 꺼낸 카드가 바로 ‘국민참여재판’이었다. 국민참여재판은 판사가 아닌 일반 시민들이 배심원으로 참여하여 형사사건의 유무죄 판단에 의견을 내는 제도다.
나는 이 제도가 특히 성범죄 사건에서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 제도에서는 법조인의 언어가 아닌 삶의 언어와 상식의 시선이 통하기 때문이다.
피해자와 피고인의 진술만 존재하는 사건, 즉 ‘진실을 안다고 주장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누가 더 설득력이 있는가’가 쟁점이 되는 상황에서는 법보다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나는 사건의 시점을 하나씩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날 피해자의 이동 경로와 주장 시각 사이의 시간 차, 이해되지 않는 태도 변화, 주변 지인의 증언, 행동 패턴 그리고 당사자의 진술 내 모순점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판결이 아닌 이야기로, 논증이 아닌 상식으로 풀어냈다.
왜 이 사건이 의뢰인의 말처럼 억울한 일인지를 배심원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해나갔다. 공방은 계속되고 있고, 재판은 한참 진행중이지만 나는 확인했다. 의뢰인이 나를 찾아왔던 그날보다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다르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지금까지 국민참여재판, 성범죄공략집, 학교폭력, 음주운전, 이혼소송, 형사소송 등의 다양한 분야의 책을 써왔다. 그 책들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려고 쓴 게 아니다. 수많은 사건들을 마주하면서 사람이 왜 법 앞에서 무너지고, 또 어떻게 다시 설 수 있는지를 매일 목격하면서 내 안의 기준과 시선, 태도를 글로 정리한 것이다.
이러한 기록과 경험이 쌓여 나라는 변호사의 중심을 단단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법을 앞세워 사람 위에 서고 싶지 않다. 오히려 사람이 법 앞에서 더 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그 앞에 먼저 서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오늘도 그 역할을 감당할 한 명의 변호사로서 이 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