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연쇄성폭행범 ‘대전 발바리’…184명 성폭행, 7년 8개월의 악몽

보일러공·검침원으로 위장해 침입
피해자 남자친구 앞에서도 범행…
‘사형 구형’에도 법원은 무기징역

1990년대 중반, 대전 원룸촌에는 불안한 소문이 돌았다. 홀로 사는 여성을 노린 성범죄가 잇따라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2005년 4월 17일, 대전에서만 하루 사이 세 명의 여성이 잇따라 성폭행당했다.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지목한 범인의 특징은 왜소한 체구, 범행 직후 종종걸음으로 달아나는 모습, 그리고 지독한 땀 냄새였다. 경찰은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추적에 나섰지만, 범인은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범인은 157cm의 작은 체구에도 민첩하게 도주해 ‘발바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는 재빠르고 날렵하다는 은어에서 비롯됐다. 이후 언론에서는 연쇄 강간범에게 ‘발바리’라는 명칭을 붙이는 경우가 많아졌고, 지역 사회도 이 사건을 ‘발바리 사건’이라 부르며 대전 시민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범인은 이중구였다. 성폭행 피해자는 무려 184명으로 확인됐지만, 법정에서는 77건의 강간, 강도, 절도 등 죄목만 인정돼 최종 피해자는 127명으로 줄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거리를 활보하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고 말해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범행의 발단은 1998년 2월, 한 여성 승객과의 시비에서 비롯됐다. 대전에서 개인택시를 몰던 그는 술 취한 여성 승객에게 “길도 모른다”며 핀잔을 듣고, 요금을 던지듯 받는 모욕을 당했다. 며칠 뒤, 그는 피해 여성의 집을 알아내 ‘보일러 수리공’을 사칭해 침입했고, 집에 있던 여성 두 명을 흉기로 위협해 결박한 뒤 차례로 성폭행했다. 피해자가 공포에 떨며 애원하는 모습을 보며 그는 이상한 쾌락과 우월감을 느꼈다.

 

이후 유흥업소 종업원, 회사원, 여대생, 가정주부, 미성년자까지 가리지 않고 범행 대상을 확대했다. 가스 배관을 타고 침입하거나, 가스 검침원·배달원으로 위장해 들어가는 치밀한 수법을 썼다. 피해 여성의 남자친구를 묶어둔 채 그 앞에서 성폭행하거나, 돈을 갖고 온 친구까지 추가로 범행하는 등 가학성도 드러냈다.

 

2001년에는 여성 7명이 함께 사는 투룸에 침입해 그중 3명을 성폭행하고, 4명을 강제추행하기도 했다. 한 피해자는 세 달 만에 같은 범인에게 다시 성폭행을 당하는 악몽을 겪기도 했다. 그는 피해 여성에게 “사랑해”라고 말하게 하는 등 비정상적인 애정결핍 증세도 보였다.

 

검거는 쉽지 않았다. 그는 신출귀몰했고 증거를 남기지 않을 정도로 치밀했다. 대전 일대에서는 “누구누구가 당했다”는 식의 소문이 돌았고, 지역 사회에서는 자체적으로 성폭행 경계령을 내리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수사 혼선을 위해 그는 “여기 상희네 집 아니냐”며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접근하거나, 공범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도 했다. 범행 뒤에는 “대전역이 어디냐”, “노숙자다”, “고아원 출신이다”라는 거짓말로 정체를 감췄다. 귀금속이나 수표는 건드리지 않고 현금만 빼앗는 등 경찰의 추적을 교묘히 피했다.

실마리는 2005년 1월 대전 대덕구 중리동에서 발생한 강간 사건이었다. 2004년 동부경찰서로 부임한 유동하 형사계장은 1999년부터 관련 자료를 모아왔고, 중리동 사건에서도 “창문으로 침입했고, 옷에서 심한 냄새가 났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피해자들은 범인을 20대 초반으로 보았지만, 다른 사건 피해자들은 40대로 묘사해 혼선이 있었다. 그러나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DNA 감식 결과, 범인은 이중구로 특정됐다. 이어 2005년 4월 17일 용문동 사건, 6월 17일 논산 사건에서도 동일 DNA가 검출됐다.

 

언론의 집중보도와 함께 경찰의 무능을 질타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이에 형사들은 2000~2005년 사이 전국 성폭행 사건을 스크랩해 분석했고, 2004년 광주 사건과 2005년 논산 사건에서 동일 차량이 포착되며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차량 명의자는 이중구였다. 경찰이 그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양말을 신고 나오겠다”며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도주했지만, 아들의 담배꽁초에서 나온 DNA가 결정적 증거가 됐다.

 

2006년 1월 19일, 서울 강동구 천호동의 한 PC방에서 온라인 게임에 몰두하던 이중구는 20명의 형사에 둘러싸여 검거됐다. 그는 “이제 후련하다”는 말을 남기며 8년간의 도주 행각을 끝냈다.

 

수사 결과 그는 1998년부터 2005년까지 7년 8개월 동안 약 180여 명의 여성을 성폭행하거나 추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조차 “본인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라고 했고, 이중구 역시 “내가 그렇게 많이 했느냐”며 놀라워했다.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지만, 법원은 “살인은 저지르지 않았다”며 피해자 127명만 인정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1960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이중구는 초등학교 시절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됐다. 구두닦이, 신문배달로 생계를 유지하다 절도로 소년원에 수감됐고, 이후 대전에서 택시를 몰며 ‘성실한 가장’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밤이면 성폭행범으로 돌변했다. 피해자에게서 빼앗은 돈은 유흥비로 쓰지 않고 저축했으며, 검거 당시 통장에는 1억4000만 원이 남아 있었다. 아내와는 20년간 혼인생활을 유지했지만, 구속 8개월 만에 합의이혼했다. 자녀들은 현재도 면회를 다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