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뒤편, 사람의 시간

범죄는 때로 삶의 균열에서 시작
법정에 선 기록되지 않은 사정들
이해될 수 있는 선택의 흔적 찾기
회복을 향한 길을 열어주는 변론

 

형사사건을 오래 다루다 보면 한 가지 사실에 자주 생각이 머문다. '사람은 반드시 나쁜 마음을 품고 범행을 저질러야만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세심한 계획과 고의가 결합된 범죄도 존재한다.

 

그러나 내가 재판정에서 실제로 마주해 온 다수의 피고인은 악의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삶의 어느 지점이 미세하게 어긋났을 뿐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다가 어느 순간 예상하지 못했던 선택을 했고, 그 작은 균열이 커다란 사건으로 이 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판사로 재직하던 시절, 나는 법정에서 피고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다. 그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 그 이야기 속에는 수십 년 의 삶이 녹아있었겠지만 - 그 삶 을 온전히 들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

 

판사의 역할은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의 신빙성과 진술의 일관성을 검토하고 그 결과를 법적으로 분류하는 일에 가깝다.

 

“이 사람이 어떤 이유와 과정을 거쳐 지금 여기에 서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은 마음속에만 남아있었다.

 

재판부의 임무는 결국 사건의 ‘사정’보다는 행위의 위법성과 책임을 엄정하게 판단해 결론을 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호사가 된 이후, 나는 법이 거의 다루지 않는 그 ‘사정’이라는 단어를 한층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한 사람의 선택과 감정, 흔들림과 실수, 억울함과 공포 등 기록 에는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요소가 사건의 결을 바꾸고 판결의 무게를 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변호사는 단순히 피고인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다. 의뢰인의 행동 뒤에 숨은 ‘이유’를 끝까지 찾아내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 과정은 변명을 만들어 내는 작업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그 선택이 인간으로서 이해 가능한 선택이었는지’, ‘어떤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선택이 었는지’를 면밀하게 살펴보는 일이다. 실제로 많은 사건에서 피고인의 동기와 과정은 단순한 ‘범죄’라는 고정된 프레임으로는 설명될 수 없었다.

 

경제적 궁핍에 놓여 단순 가담자로 끌려 들어간 사람, 감정적 으로 붕괴된 순간에 판단력이 흐려진 사람, 지인의 부탁 이나 관계가 주는 압박 앞에서 경계심이 무너진 사람 등 복잡하고 구체적인 사정은 사건마다 다르게 존재했다.

 

이 들은 처음부터 범죄를 계획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들을 몰아붙인 결과 잘못된 문턱을 넘어선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판사 시절에는 고소장, 진술조서, 증거 목록, 감정서 같은 수백 쪽에 달하는 종이 속에서만 사건을 접했다. 그 기록들은 언제나 분절된 조각들로만 남아 있었다.

 

그 안에서 피고인의 삶은 쪼개져 있었고, 그가 느꼈던 감정은 읽어낼 수 없었다. 모든 사건이 ‘범행 이전 – 범행 – 범행 이후’라는 구조로 단순화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호사가 된 지금 나는 사건뿐 아니라 사람의 시간 전체를 본다. 그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왔고, 어떤 판단을 했으며, 사건 당일 어떤 감정과 상황이 그를 밀어붙였는지까지 살핀다.

 

의뢰인을 ‘범죄자’로만 바라보면 그 사람 에게 남는 것은 ‘죄’뿐이다. 그러나 사람으로 바라보는 순간, 그 안 에서 회복의 가능성과 새 삶을 살아갈 여지가 보인다. 형사사건의 본질은 때로 엄정한 단죄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반드시 회복이라는 가치가 자리 해야 한다.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 하나가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지워버리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사회로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를 보 장하는 것 또한 법의 중요한 기능이다.

 

법정에 서는 순간은 그들 인생에서도 최저점의 순간인 경우가 많다. 바로 그 자리에서 변호인은 과거의 선택을 이해하고 미래의 가능성을 증명해야 하는 무거운 역할을 맡는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의뢰인을 범죄자가 아니라 삶의 어느 지점에서 방향을 잃은 사람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 방향을 다시 찾도록 돕는 것이 변호사의 본질적 역할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은 내가 판사에서 변호사가 된 이후 지금까지 가장 소중하게 붙잡고 있는 신념이며, 나의 변론의 출발점이자 마지막 기준이기도 하다.